독립운동가 김약연(金躍淵)1868년 9월 12일 ~ 1942년 10월 29일

2023. 10. 29. 23:15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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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약연(金躍淵)1868년 9월 12일 ~ 1942년 10월 29일

일제강점기 간민교육회 임원, 회장, 간도 한인 대표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교육자.
김약연 선생은 1899년 중국 만주로 넘어간 다음 북간도 화룡현에 자리를 잡고 명동학교와 간민교육회를 설립하여 나라 없이 만주로 온 동포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북간도에서 독립선언서를 발간하였으며,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김약연(金躍淵, 1868.9.12~1942.10.29) 선생은 1868년 9월 12일 함경북도 회령군 동촌 옹희면 제일리 행영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의 호는 규암(圭巖)이다. 선생은 8세 때인 1875년부터 10여년 간 함북 종성 출신의 유학자들인 남종구․오삼열․주봉의 등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이 때 선생은 명석한 두뇌와 원만한 품성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여러 선생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온 마을의 모범 소년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또한 이 시기 선생은 ≪맹자≫에 심취하였던 것 같다. 때문에 선생에게 글을 가르치던 스승 남종구는 “약연은 ≪맹자≫를 만독 (萬讀)해서 이제는 눈감고도 줄줄 욀 수 있으니 틀림없는 맹판(孟板)이야”하고 감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마도 선생이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과 수탈로 인해 날로 참담해 가는 나라의 운명을 깊이 생각하고, 그 난국의 해법을 맹자의 경세론(經世論)에서 찾아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즈음의 정세는 급박하였다.

개항 이후 일제의 개항장을 통한 미곡의 대량 반출과 연연이 계속된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우리 농촌은 피폐하여 유랑민들이 급증하고 있었다. 이들 유랑민들은 “앉아서 굶어 죽느니 배불리 먹기 위하여 가다 죽는다”는 각오로 월경하여 간도로 대거 이주를 권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885년 청나라 또한 만주족의 근거지이자 청 황실의 발상지인 만주지역에 수백년간 실시해오던 봉금령(封禁令)을 완전히 폐지하고, 두만강 이북의 길이 700리, 넓이 4․50리의 넓은 지역을 한국 이주민이 개간하여 정착할 수 있는 전간구역(專墾區域)으로 지정하였다. 따라서 이후 한인의 만주이주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두만강 너머 만주로 건너가 5만평 토지 사들인 후 교육기관 세워

이 같은 시기인 1899년 2월 18일 선생은 가솔 및 인근의 10여 가구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화룡현 지신사 장재촌으로 이주하여 명동촌이라고 하는 한인촌을 형성하여 갔다. 선생은 한인촌을 개척하면서 후세교육을 위해 1901년 4월 청국인 토호 동한(董閑)으로부터 5만평의 토지를 매입하여 학전(學田)을 삼고, 이를 장학재원으로 하여 규암재(圭巖齋)라고 하는 사설 교육기관을 창설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청년들을 모아서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공부를 시키며 각종 교육 계몽 사업을 벌여 한인동포들의 자조자립과 협동정신을 고취하여 동지적 유대의 민족적 일체감을 조성하여 갔다.

이는 선생이 평소부터 “왜 우리는 부지런히 일하는데 남의 나라 사람보다 못살까. 땅이 비좁은 까닭일까, 아니다 이웃 나라들이 우리를 못살게 구는 까닭이다. 우리땅을 송두리째 삼키려는 원수를 이 땅에서 몰아낸 뒤라야만 우리는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이다. 힘이다, 오직 힘이다. 이들을 몰아낼 만한 힘을 기르는 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힘을 기르기 위한 최우선 방안으로 교육 계몽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이즈음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통하여 청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낸 뒤 러시아와 세력 각축을 벌이던 중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켜 갔다. 그리하여 일제는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그해 2월 23일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한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제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영토를 집유하여 갔고, 또 8월 22일에는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고문(顧問)정치를 실시함으로써 내정간섭을 본격화하여 갔다.

그리고 일제는 러일전쟁 승전 직후 제국주의 열강의 양해 아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자주적 외교권과 통치권을 장악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그 해 7월 24일 강제로 ‘정미 7조약’을 체결케 하여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켜 갔다.

이 같은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자 선생은 1907년 김영학․강백규․구춘선․유찬희․마진 등 동지들과 함께 간도교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이 교민회를 통하여 한인 동포들의 생활안정과 교육계몽, 민족정신 고취에 힘쓰는 한편, 동포들이 매입한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중국 정부와 교섭하여 확인해 주는 등 권익옹호에 주력하여 북간도의 민족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로 만들고 초대 교장으로 일해

특히 민족의 힘을 기르는 길은 후세교육에 있다고 생각한 선생은 1908년 4월 27일 종제(從弟)인 김학연․박무림․문치정․김하규 등 동지들과 함께 규암재를 모체로 하여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고, 초대 숙감(塾監)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민족 교육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명동서숙은 1906년 12월 북간도 용정에서 이상설의 주도로 설립되어 운영되다가 그가 헤이그 특사로 떠난 뒤 일제의 탄압과 운영난으로 폐교된 서전서숙(瑞甸書塾)이 민족교육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명동서숙의 유지와 발전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나갔고, 1909년 4월에는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로 확대 발전시켜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런 다음 선생은 서울 기독교청년학관을 나온 정재면 등 우수교사를 초빙하여 교육수준과 내용에 충실을 기함으로써 북간도에서의 민족교육의 토대를 구축하여 갔다.

다른 한편으로는 1909년 9월 4일 청․일 간에 조인된 ‘간도협약’에 따라 북간도의 한인 동포들이 어느 정도 자치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자, 선생은 곧바로 그해 9월 이동춘 등과 협의하여 동포들에 대한 교육사무를 명목으로 간민교육회를 조직하여 중국정부의 설립허가를 받았다. 선생은 이 교육회에서 처음에는 간사, 뒤에는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간민교육회월보≫를 발행하여 재만 한인동포들의 계몽과 청소년들의 반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함은 물론, 중국정부의 지원 아래 동포들의 권익보호 활동에도 앞장섰다. 따라서 간민교육회는 재만 한인동포들에 대한 교육사무만이 아니라 중국 당국의 행정업무도 지원하고 관장했던 한인 자치기관의 효시였다.





명동학교 학생의 작문에 ‘애국’ ‘독립’이 없으면 점수를 받지 못해

선생은 1910년 3월에는 명동학교에 중등교육과정으로 명동중학을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취임한 뒤 국내에서 국사학자인 황의돈과 한글학자인 장지영, 박태환 등을 교사로 초빙하여 민족교육의 질적 수준을 제고하며,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아울러 1911년 3월에는 명동학교에 여학교를 병설하여 여성에 대한 교육계몽과 민족 정신 고취에도 헌신하여 갔다. 특히 명동학교에서의 민족교육은 철저하여 작문시간에 ‘애국’ ‘독립’이란 낱말이 들어가지 않으면 아예 점수를 주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따라서 명동학교에는 북간도는 물론 국내 및 만주 각처와 노령 등지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과 애국지사들이 운집하였고, 명동학교에서 철두철미한 애국애족의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배일사상에 고취하여 명동지역은 이제 재만 한국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어 갔다.

이즈음 중국에는 1911년 손문이 이끄는 신해혁명이 일어나 1912년에는 청조(淸朝)의 전제군주제가 타도되고 민주공화제 정부인 중화민국이 탄생하였다. 새로 성립한 중화민국 정부가 연성자치(聯省自治)를 표방하여 중국 각지는 자치의 분위기가 성숙되고 있었다. 이 같은 중국에서의 지방자치의 물결은 북간도에도 전해져 간민교육회를 주도하던 선생과 이동춘․김립등은 본격적인 한인 자치기구를 창설하기 위한 움직임을 가속화시켰다





선생이 세운 간민회, 세금까지 징수하는 등 북간도의 한인정부와 같은 역

특히 1912년 이동휘가 명동으로 망명해 온 것을 계기로 선생은 이동춘․정재면․김영학․박찬익 등과 함께 1913년 4월 간민교육회를 간민회(墾民會)로 확대 발전시켜 북간도 한인동포들의 공식적인 자치기관으로 중국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았다. 선생은 이 간민회의 회장을 맡아 본부를 국자가 (局子街)에 두고 연길․화룡․왕청현 등지에 분회를 설치하여 북간도의 한인동포들을 관장하였다. 즉 간민회는 한인동포들에 대한 호구조사와 교육계몽사업은 물론 세금까지 매겨 징수하는 등 북간도의 한인정부와 같은 존재였다. 중국 관청 또한 일체의 한인 관련 업무를 이 단체를 통하여 집행하는 등 간민회는 명실공히 중국 정부의 보호와 지원 아래 성립한 북간도 한인 동포들의 자치기구이자 자치정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간민회는 원세개(袁世凱) 집권 이후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지방자치기관의 철폐령과 일제의 집요한 압력으로 그 해 1914년 3월 해산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조국 독립의 신념을 잃지 않고, 명동학교의 운영에 전념하면서 후세들에 대한 민족교육과 독립사상 고취에 정성을 다하여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여 갔다. 따라서 명동학교 학생들과 졸업생들은 이후 재만 한국 독립운동의 주력군으로 등장하였고, 그에 따라 선생은 이들의 정신적이며 실천적 지도자로 추앙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고, 그 해 11월 11일 공식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다음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졌다. 우리 민족은 이 같은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을 획득하고자 국내외에서 독립선언계획을 추진하여 갔다.

만주지역의 독립운동가들도 이 같은 소식을 접하고 독립선언계획을 추진하여 갔다. 그리하여 1918년 무오년 음력 12월 만주와 노령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되었다. 이 독립선언은 당시 만주와 노령은 물론 미주 등 여러 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동휘․김좌진․조용은․이승만․안창호 등 저명한 독립운동 지도자 39인의 명의로 발표되어 이후 재일한국 유학생들의 동경 2․8독립선언과 국내 3․1독립선언의 기폭제가 된 것이었다. 선생 또한 이러한 대한독립선언서 발표 명의자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으니, 당시 선생의 민족운동상의 위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정재면과 함께 북간도 대표로 선정되어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가 중심이 되어 1919년 2월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개최한 한족대표자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 회의는 노령 각지는 물론 서간도와 북간도, 그리고 국내의 단체 및 지역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작성 선포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선정 파견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해 3월초까지 속행하여 대한국민의회를 성립시킨 이 회의에서 선생은 “일제가 온갖 협박과 공갈적인 수법을 동원하여 한국인은 일본에 합방을 원한다는 의사를 파리강화회의에 제공할 계략을 꾸미고 있다”고 하면서 이에 대한 강력한 항의와 대비책을 촉구하였다.



3․1운동 직후 북간도에서 만세 시위 운동 전개. 18명이 피살

그리고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여 전국 각지로 파급되자 선생은 북간도에서 독립선언대회를 추진하였다. 우선 선생은 정재면․강봉우 등 동지들과 함께 극비리에 거사계획을 세운 뒤, 국내의 회령으로부터 3․1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이를 명동학교에서 대량 등사하였다. 그리고 명동학교의 애국학생조직인 충렬대 대원들로 하여금 독립선언서를 북간도 전역에 전달 배부하도록 하였다.그리하여 1만여 명의 북간도 한인동포들은 3월 13일 북간도 연길현 용정 북쪽에 위치한 서전대야(西甸大野)에 모여 독립선언 축하회를 개최하였고, 이어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용정 만세 시위운동은 선생이 그 동안 민족교육을 통해 배출한 명동학교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이 ‘대한독립’이라고 대서특필한 깃발을 앞세우고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주도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중국 관헌과 교섭하여 중국 군대로 하여금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저지하도록 조종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군대의 발포로 명동학교 충렬대원을 포함한 18명의 만세 시위운동자들이 피살되고 3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선생을 비롯한 북간도의 민족지도자들은 이 같은 용정 만세시위 이후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또 우후죽순처럼 난립한 대소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여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기 위한 통일조직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북간도의 통일적 독립운동단체로 그 해 3월 조선독립기성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때 구춘선이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선생은 의사(議事)부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단체는 그 해 4월 13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 정통성을 인정하여 국호와 단체의 이름이 서로 상충되지 않도록 단체명을 대한국민회로 개칭하였다.선생이 의사부원으로 활동한 대한국민회는 북간도에서 한인동포들에 대한 민사업무와 제반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관장하였다. 즉 대한국민회는 선생에 의해 북간도에서 최초로 조직된 한인자치기관이었던 간민회의 조직과 인맥을 계승하여 한인동포들에 대한 민사행정을 실시하였고, 또 군사활동은 홍범도 부대와 안무 부대를 산하에 두고 지원 육성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수행하였다.



연길 감옥에서 3년 옥고 치렀으나 출옥 후 동포 권익 보호 운동

이와 같이 북간도는 물론 노령 등지에서의 독립운동 주도로 말미암아 선생은 일제로부터 한국독립운동의 ‘수령(首領)’으로 지목되어 체포의 표적이 되었다. 이에 평소 선생의 친중국 노선과 인품에 매료된 중국 연길현장 도빈은 일제의 마수가 뻗치기 전에 먼저 선생을 보호차원에서 체포․감금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연길감옥에 구금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렀으나 사실상 연금에 지나지 않는 특별대우를 받았다.

출옥 직후 선생은 1923년 2월 26․27일 양일간 용정에서 개최된 전간도 주민대회에서 30만 간도 한인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하고, 나아가 ‘간도 자치권’ 획득을 위한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간도의 자치권 획득을 위하여 중국 당국과 지속적으로 교섭활동을 벌이는 등 한인동포들의 권익보호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 때문에 중국인들과 지방행정 당국자들은 선생을 ‘한궈따충퉁(韓國大統領)'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 후 1928년 선생은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의 연구과정의 수업만을 받고 1929년 2월 졸업하는 파격적인 특전을 받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이듬해부터 명동교회 목사로 봉직하면서 전도사업을 통하여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전파하여 갔다. 이와 함께 비록 선생이 설립했던 명동중학은 일제의 탄압과 1924년의 대흉년으로 이듬해 문을 닫았지만, 명동소학교는 선생이 임종할 때까지 직접 경영하면서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불굴의 의지로 조국의 밝은 미래를 준비하여 갔다. 그리고 만년에는 캐나다 선교회에서 북간도 용정에 설립한 은진(恩眞 )중학교의 이사장에 선출되어 그 뒷바라지를 하다가 1942년 10월 29일 용정시 자택에서 선생은 “내 모든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7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스스로 개척하여 민족독립운동의 동량(棟梁)들을 배출하고, 이름 그대로 조국광복의 날을 밝혔던 명동 땅에 묻혔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