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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나석주 선생

    독립운동가 나석주 선생격전의 한복판에서 민족혼에 다시 불을 지핀 사람1892년 겨울, 격랑의 시대 한가운데서 태어난 소년이 있었다. 나석주.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독립의 숨결 속에서 자랐다. 신민회 서북지방 책임자였던 김구가 세운 양산학교에서 한문을 배우며, 글자 너머의 뜻—나라를 잃은 백성의 분노와 회복의 의지—를 몸으로 익혔다. 소년의 하루는 배움이었고, 그 배움의 끝은 실천이었다.젊은 나석주는 뜻을 함께한 또래들과 군자금을 마련하기로 결심한다. 황해도의 부호 최병항의 집을 찾은 밤, 그들은 복면을 썼지만 마음은 숨기지 않았다. “일반 강도가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군자금을 구하러 왔습니다.” 말은 곧 신뢰가 되었고, 거액의 자금이 손에 쥐어졌다. 그러나 떠나며 남긴 당부는 더 깊었다. “곧 강도를..

    2025.12.29
  • 독립운동가 문양목 선생

    독립운동가 문양목 선생동학의 불씨를 태평양 너머까지 옮긴 사람태백산을 노래하던 시 한 편에는 선생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산과 물을 묻고, 선조의 자취를 부르며, 청년들에게 전진을 당부하는 목소리. 문양목 선생의 시는 노래이기 전에 선언이었다. 강식약육의 시대를 건너기 위해, 뜻을 태산처럼 세우라는 경계였다.선생의 뿌리는 깊었다. 목화씨를 들여와 백성의 삶을 바꾼 문익점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탐관오리와 무능한 권력이 민중을 짓누르던 때 동학농민운동에 몸을 던졌다. 그 싸움은 가혹했고, 선생의 아내는 전투 중 목숨을 잃었다. 개인의 상실은 곧 결단으로 바뀌었다. 남은 삶을 온전히 조국에 바치겠다는 맹세였다.선생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흘린 땀은 생계를 위한 노동이자 독립의 씨..

    2025.12.29
  • 독립운동가 김화영 선생

    독립운동가 김화영 선생장날의 함성으로 역사를 흔들다경상북도 안동 예안.1919년 봄, 장날의 소란 속에 조용히 숨을 고르던 마을은 어느 순간 역사의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김화영 선생은 그날의 중심에 있었다. 만세는 우연히 터진 외침이 아니었다. 며칠 전 밤, 면사무소 숙직실에 모인 이들은 독립신문을 펼쳐 들고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뜻은 하나였고, 날짜는 정해졌다. 예안 장날, 3월 17일.면사무소의 등사판은 밤새 돌아갔다. 종이 위에는 선언서가 찍혔고, 손마다 태극기가 쥐어졌다. 인근 동리로 소식이 퍼지자, 장터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장꾼으로 가장해 모여들었다. 오후 3시 30분, 약속된 시각. 서른여 명의 주동자들이 선성산에 올라 일본이 세운 대전기념비를 쓰러뜨렸다. 그 순간, 태극기가 하..

    2025.12.29
  • 문창학 선생

    문창학 선생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작전을 벌인 대한군정서 소속 독립군이름 없이 싸우고, 노래로 남은 사람문창학이라는 이름은 교과서에서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초상도, 자필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그러나 두만강을 건넜던 발자국과, 밤을 가르던 총성,그리고 한 곡의 노래 속 울음으로 그는 지금까지 살아 있다.문창학 선생은 1882년, 함경북도 온성에서 태어났다.국경의 끝자락, 늘 강을 마주 보아야 했던 땅에서의 삶은나라의 안과 밖이 종이 한 장 차이로 갈리는 현실을 일찍부터 깨닫게 했다.두만강은 생계의 길이기도 했지만,언제든 넘어야 할 운명의 선이기도 했다.1919년, 3·1운동은 문창학의 삶을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끌었다.만세의 함성이 총검으로 짓밟히던 그해,그는 간도로 망명해 대한군정서에 몸을 의탁..

    2025.12.22
  • 윤봉길 의사 (1908.6.21 ~ 1932.12.19)

    윤봉길 의사 (1908.6.21 ~ 1932.12.19)한 사람의 결단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다윤봉길은 총을 들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다.중국 상하이의 거리에서 채소를 팔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청년이었다.그러나 나라를 잃은 시대는, 평범한 삶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장터의 저울 위에서 그는 민족의 무게를 달았고,채소를 고르던 손은 끝내 폭탄을 쥐게 되었다.1931년 겨울, 윤봉길은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김구**를 찾아갔다.이름도, 직책도 내세우지 않았다.다만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음을 조용히 밝혔다.그 진정은 한인애국단으로 이어졌고,역사의 날짜는 1932년 4월 29일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그날은 일본 일왕의 생일, 천장절이자상하이 점령을 자축하는 날이었다.홍커우 공원에는..

    2025.12.22
  • 김수민 선생

    김수민 선생경기 의병을 이끈 무장의 손, 끝내 굽히지 않은 결기김수민 선생은 경기도 장단군 북면 솔랑리에서 태어났다.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되, 삶의 방향은 책상보다는 들판과 산을 향해 있었다.어려서부터 사격술과 전술에 능했고, 무엇보다 화약과 탄약을 다루는 기술을 몸에 익혔다.총이 귀하던 시절, 스스로 무장을 꾸릴 수 있는 이는 곧 전장의 중심이 되었다.선생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전, 이미 한 차례 큰 격랑을 겪고 있었다.동학농민혁명이다.선생은 농민군에 가담해 일본 세력과 맞섰고,이때의 경험은 이후 의병전쟁으로 이어지는 밑바탕이 되었다.총을 쥐는 법만이 아니라, 백성과 함께 싸우는 법을 이때 배웠다.1907년, 나라의 꼴은 더 이상 나라라 부르기 어려웠다.광무황제가 강제로 물러났고, 대한제국의 군대는 ..

    2025.12.22
  • 김승학 선생

    김승학 선생무장투쟁과 기록의 길을 함께 걸은 독립운동가1907년 여름, 나라의 숨통이 끊어지던 시절이었다.헤이그에 특사가 파견된 일을 빌미 삼아 고종 황제가 강제로 물러났고,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해산되었다.국권은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고, 조정은 침묵했다.이때 김승학 선생은 침묵하지 않았다.상경해 종로의 길목마다 서서 배일 강연을 이어갔다.일본의 침탈을 말로 고발하는 일은 곧 체포를 뜻했다.선생은 평리원 구치감에 갇혀 석 달을 보냈다.그러나 그 시간은 굴복의 시간이 아니었다.말의 싸움이 끝나면, 길은 더 깊은 곳으로 이어진다는 결심의 시간이었을 뿐이다.출옥 후 선생의 걸음은 두 갈래로 뻗었다.하나는 신민회에 들어가 조직적으로 국권회복운동에 나서는 길이었고,다른 하나는 교육계몽을 통해 민족의 눈..

    2025.12.22
  • 독립운동가 손치형 선생(孫致亨, 1920.12.20 ~ 1998.12.11)

    독립운동가 손치형 선생(孫致亨, 1920.12.20 ~ 1998.12.11)광복군 제3지대에 몸을 실은 청년, 해방을 향한 침묵의 전선손치형 선생은 1920년 12월 20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압록강을 마주한 의주는 일찍부터 국경의 긴장과 시대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땅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선생은 나라를 잃은 현실을 일상처럼 마주하며 성장했다.청년이 되었을 무렵, 조국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었다.선생은 침묵 속에 살기보다는 행동으로 시대에 응답하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배속되어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다.광복군 제3지대는 주로 중국 내 후방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연합군과의 협력, 정보 수집, 군사 훈련, 향후 국내 진공을..

    2025.12.15
  • 독립운동가 정이형 선생(1897.9.16 ~ 1956.12.10)

    독립운동가 정이형 선생(1897.9.16 ~ 1956.12.10)반듯하고 치열한 항일의 길, 고려혁명당의 중심에 서다정이형 선생의 삶은 처음부터 조용하지 않았다.항일 무장투쟁에 몸담았던 김평식으로부터 한학과 항일의식을 전수받았고,친형 역시 독립운동에 나서 있던 집안에서선생은 일찍부터 나라의 아픔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였다.1919년, 전국을 뒤흔든 3·1운동의 물결 속에서선생 또한 거리로 나섰다.만세의 함성은 곧 깨달음으로 이어졌다.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외침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절실함이었다.그리하여 선생은 선룡사립보통학교를 세웠다.교실은 작았으나 뜻은 컸다.그곳에서 아이들은 글을 배우는 동시에자기 이름과 겨레의 이름을 함께 배워갔다.민족 교육은 선생에게 ..

    2025.12.15
  •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1881.1.29 ~ 1950.12.10)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1881.1.29 ~ 1950.12.10)언어의 천재였던 현실주의자, 임시정부 부주석“독립은 누가 첩지처럼 내어주는 것이 아니다.전 민족의 합심과 준비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 것이 된다.”김규식 선생의 삶은 언제나 이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뜨거운 구호보다 냉철한 판단을, 감정적 분노보다 준비된 힘을 중시했던 인물.그는 독립운동사에서 드물게 이상과 현실을 동시에 껴안은 정치가였다.- 굶주림에서 시작된 냉정한 지성김규식 선생의 어린 시절은 비참했다.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삼촌들의 집을 전전하던 아이는굶주림 속에서 병을 얻고 죽음의 문턱까지 몰렸다.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아이는 방 한켠에 눕혀졌고,벽지까지 뜯어먹을 만큼 배고픈 모습으로 발견되었다.그 아이를 살린 이는 미국인 선교..

    202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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