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22. 01:26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김수민 선생
경기 의병을 이끈 무장의 손, 끝내 굽히지 않은 결기
김수민 선생은 경기도 장단군 북면 솔랑리에서 태어났다.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되, 삶의 방향은 책상보다는 들판과 산을 향해 있었다.
어려서부터 사격술과 전술에 능했고, 무엇보다 화약과 탄약을 다루는 기술을 몸에 익혔다.
총이 귀하던 시절, 스스로 무장을 꾸릴 수 있는 이는 곧 전장의 중심이 되었다.
선생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전, 이미 한 차례 큰 격랑을 겪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이다.
선생은 농민군에 가담해 일본 세력과 맞섰고,
이때의 경험은 이후 의병전쟁으로 이어지는 밑바탕이 되었다.
총을 쥐는 법만이 아니라, 백성과 함께 싸우는 법을 이때 배웠다.
1907년, 나라의 꼴은 더 이상 나라라 부르기 어려웠다.
광무황제가 강제로 물러났고,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되었다.
지킬 군대가 사라진 자리에, 지키려는 사람들이 스스로 일어섰다.
김수민 선생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선생은 경기도 일대에서 농민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직접 화약을 만들고 탄약을 손질하며,
자체 무장이 가능한 의병부대를 꾸렸다.
이 능력은 곧 신뢰가 되었고,
신뢰는 사람을 불러 모았다.
삽을 들던 손들이 총을 잡았고,
밭고랑을 알던 발걸음이 산길을 꿰뚫었다.
1907년, 선생은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총대장 이인영의 돌연한 귀향과 각 부대의 진군 차질로
작전은 끝내 무산되었다.
좌절의 시간이 길어질 법도 했으나, 선생은 물러서지 않았다.
1908년, 김수민 선생은 휘하 의병부대를 이끌고
경기 동북부 지역에서 연합의병을 형성했다.
일본군의 헌병분파소를 습격하고,
식민 통치의 말초 신경을 하나씩 끊어냈다.
일제의 토벌은 거셌으나, 선생의 부대는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며
끈질기게 싸움을 이어갔다.
1909년 3월, 선생은 다시 한번 큰 결단을 내린다.
‘창의도독부사령장겸군량관’ 명의로 격문을 보내
군자금을 모으는 한편,
의병부대를 새로 정비했다.
그리고 직접 서울로 잠입해
총기와 군수품을 구입하고,
이를 다른 의병장에게 나누거나 은닉해
장기 항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서울은 더 이상 숨을 곳이 아니었다.
일제는 이미 한 차례 체포에 실패한 경험이 있었고,
김수민 선생을 눈엣가시처럼 쫓고 있었다.
1909년 8월, 고양군 하동면으로 몸을 옮겼으나
끝내 경성 필동 헌병대에 부하 두 명과 함께 붙잡히고 말았다.
체포 뒤 이어진 것은 혹독한 취조와 고문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를 죽일지 살릴지 빨리 결정하라.
장황하게 물어도 답할 것은 없다.”
이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끝까지 동료 의병의 이름을 지켰고,
조직의 실마리를 넘기지 않았다.
1909년 11월,
김수민 의병장은 교수형을 선고받고 생을 마쳤다.
약 2년에 걸친 구국의병전쟁은
이렇게 한 사람의 몸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싸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만든 화약,
그가 숨겨둔 무기,
그가 남긴 결기는
다음 싸움을 준비하는 씨앗으로 남았다.
김수민 선생은
정미의병 시기, 경기 의병의 한 축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이름보다 행동이 앞섰고,
말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던 의병장.
정부는 그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총을 들었던 사람들 가운데,
끝까지 말을 아끼고 행동으로 남은 이름.
김수민.
그 이름은 지금도 경기의 산과 들 사이에 남아 있다.
- 작가의 글
총을 든 손은 기록으로 남기기 어렵다.
글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손이 늘 화약과 흙, 피 묻은 무기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수민 선생의 삶은
화려한 선언이나 장광설이 아닌
기술과 결단, 그리고 침묵으로 이어진 항쟁의 시간이었다.
화약을 만들 줄 아는 이는 많지 않았고,
무기를 스스로 꾸릴 줄 아는 이는 더 적었다.
그 능력은 곧 책임이 되었고,
책임은 결국 죽음의 자리로 그를 이끌었다.
고문 앞에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영웅적 선택이라기보다
함께 싸운 사람들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아주 인간적인 결심이었을 것이다.
“답할 것이 없다”는 한마디는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증언이었다.
사진으로 남은 얼굴도,
자필 기록도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빈자리는 오히려 질문을 남긴다.
나라가 무너질 때,
한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김수민 의병장의 삶은
그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대답으로 남아 있다.
말없이 준비하고,
앞에 서서 싸우고,
끝내 이름 대신 행동으로 기억되는 삶.
그 조용한 결기가 오늘을 사는 이들의 가슴에도
작은 불씨로 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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