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학 선생

2025. 12. 22. 01:13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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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선생
무장투쟁과 기록의 길을 함께 걸은 독립운동가

1907년 여름, 나라의 숨통이 끊어지던 시절이었다.
헤이그에 특사가 파견된 일을 빌미 삼아 고종 황제가 강제로 물러났고,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해산되었다.
국권은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고, 조정은 침묵했다.

이때 김승학 선생은 침묵하지 않았다.
상경해 종로의 길목마다 서서 배일 강연을 이어갔다.
일본의 침탈을 말로 고발하는 일은 곧 체포를 뜻했다.
선생은 평리원 구치감에 갇혀 석 달을 보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굴복의 시간이 아니었다.
말의 싸움이 끝나면, 길은 더 깊은 곳으로 이어진다는 결심의 시간이었을 뿐이다.

출옥 후 선생의 걸음은 두 갈래로 뻗었다.
하나는 신민회에 들어가 조직적으로 국권회복운동에 나서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육계몽을 통해 민족의 눈을 뜨게 하는 길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실은 총칼 없는 전선이었고,
그곳에서 선생은 조용히 나라를 키우고자 했다.

그러나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선생의 삶을 다시 흔들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뒤, 일제의 감시는 더욱 집요해졌다.
학교로 들이닥친 일본 경찰은 안중근과의 연관을 캐물었고,
학부형들에게는 “불온한 인물에게 배우면 아이들도 불량해진다”는 말까지 흘렸다.
교단에서조차 설 자리가 사라지자, 선생은 결단한다.
이 땅을 떠나, 더 큰 싸움을 준비하겠다는 선택이었다.

선생은 임시정부의 연통제 평안북도 독판부 특파원으로 국내에 잠입해
독립자금을 모았다.
이어 상하이로 향해 무기 구매 임무를 맡았다.
권총 240정, 수만 발의 탄약.
바다와 육로를 오가며 수차례 죽음을 넘긴 끝에,
선생은 무기를 품고 다시 서간도로 돌아왔다.

광복군사령부에서 무기가 분배되던 날,
선생의 연설에는 피와 땀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이 무기는 동포들의 피와 땀으로 마련한 것이다.
한 발도 헛되이 쓰지 말고, 한 탄환에 왜적 한 명을 맞힌다는 각오로 싸워야 한다.”

이 무기들은 곧 전과로 이어졌다.
광복군사령부 휘하 부대들은 국내 진공작전을 벌이며
일본군과 수십 차례 교전했고,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불태우며 식민통치의 신경을 끊어냈다.
무기는 단순한 쇳덩이가 아니라,
되찾겠다는 의지의 형상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길은 다시 감옥으로 이어졌다.
중국에서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된 뒤,
5년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을 맞아 1945년 가을, 선생은 마침내 고국 땅을 밟았다.

광복 이후, 선생이 가장 먼저 붙든 일은 기록이었다.
독립운동사 편찬회를 조직해 자료를 모으고,
잊힌 이름과 사건들을 글로 남기려 했다.
하지만 시대는 또다시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동지들의 권유로 군사조직 결성에 나섰고,
광복군 국내 지대의 참모장으로 임무를 맡았다.
개성 만월대에 임시 군영을 두고 청년들을 훈련시켰으나,
미 군정의 지시로 그마저 해산되고 말았다.

신문을 다시 펴도,
단정 반대라는 이유로 폐간되었다.
정치의 소용돌이는 기록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생은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1953년,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해
다시 펜을 들었다.
피로 쓰인 역사 위에, 웃음으로 완성될 역사를 남기고자 했다.

1964년, 마침내 『한국독립사』 원고를 탈고했다.
그러나 책은 선생의 눈을 보지 못했다.
출간을 앞두고, 그해 12월 17일 선생은 생을 마쳤다.
그의 독립사는 유고가 되었고,
우리는 그 뒤늦은 페이지를 오늘에서야 넘기고 있다.

- 작가의 글

이름 없이 사라질 뻔한 기록을 다시 세워 읽다 보면,
독립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결과가 아니라
수없이 반복된 선택의 총합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총을 든 손과 펜을 든 손이 같은 마음에서 나왔다는 사실,
그 마음을 잇는 일이 오늘의 몫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