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1881.1.29 ~ 1950.12.10)

2025. 12. 15. 00:59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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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1881.1.29 ~ 1950.12.10)

언어의 천재였던 현실주의자, 임시정부 부주석

“독립은 누가 첩지처럼 내어주는 것이 아니다.
전 민족의 합심과 준비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 것이 된다.”

김규식 선생의 삶은 언제나 이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뜨거운 구호보다 냉철한 판단을, 감정적 분노보다 준비된 힘을 중시했던 인물.
그는 독립운동사에서 드물게 이상과 현실을 동시에 껴안은 정치가였다.

- 굶주림에서 시작된 냉정한 지성

김규식 선생의 어린 시절은 비참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삼촌들의 집을 전전하던 아이는
굶주림 속에서 병을 얻고 죽음의 문턱까지 몰렸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아이는 방 한켠에 눕혀졌고,
벽지까지 뜯어먹을 만큼 배고픈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그 아이를 살린 이는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였다.
분유와 약을 들고 찾아온 그는 아이를 고아원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김규식은 언어와 학문을 만났다.
영어, 라틴어, 수학, 신학, 과학—
배움은 생존이었고, 지성은 스스로를 지키는 방패였다.

차별과 냉대 속에서 자란 소년은
세상을 감정으로 대하지 않게 되었고,
그 대신 구조와 힘의 흐름을 읽는 눈을 갖게 되었다.

- 지성으로 맞서는 길을 택하다

프린스턴대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러일전쟁의 향방을 미리 내다보았고,
일본의 승리가 곧 조선의 위기로 이어질 것을 예감했다.

국내에서는 연희전문에서 교편을 잡았고,
언더우드의 비서로 일하며 기독교적 윤리와 국제 감각을 익혔다.
그러나 1910년 전후,
안악사건과 105인 사건으로 국내 독립운동의 토대가 무너지자
그 역시 망명의 길을 택한다.

호주 유학을 가장해 상해로 향한 그는
신채호, 박은식, 조소앙 등과 함께 박달학원을 세우고
젊은이들에게 민족의 뜻을 가르쳤다.
이 무렵 ‘김성’이라는 가명으로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며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호소했다.

- 파리로 간 조선의 외교관

1918년, 세계는 변하고 있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틈을 만들었다.
영어와 불어에 가장 능통했던 인물,
국제법과 외교 문법을 이해한 사람—
파리로 갈 수 있는 이는 김규식뿐이었다.

1919년 2월, 신혼의 기쁨을 뒤로하고 파리를 향한 길.
도착 직후 들려온 소식은 조국의 3·1운동이었다.
그 순간, 개인의 삶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조선의 대표만이 남았다.

파리에 한국대표관을 열고,
공고서와 비망록을 제출하며
일본의 침략과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조목조목 밝혔다.
비록 열강의 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그의 말은 기록으로 남아 세계에 전해졌다.

- 연합과 통합을 향한 끝없는 모색

외교의 한계를 절감한 뒤,
김규식은 피압박 민족 간의 연대를 택했다.
중국의 항일 세력과 손을 잡았고,
김원봉·조소앙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김구와 함께 주석단을 이루며 부주석으로 활동했다.
그는 언제나 내부 분열을 가장 큰 위기로 보았다.
자리와 명분보다 합심과 준비를 먼저 말한 이유였다.

- 분단을 막으려 한 마지막 선택

광복은 왔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남과 북이 갈라지는 흐름 앞에서
김규식은 다시 한 번 현실을 직시했다.

1948년, 김구와 함께 북으로 향해
남북협상에 나섰다.
그 선택은 위험했고, 고독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하나의 나라를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분단은 막지 못했고,
1950년 전쟁 속에서 그는 납북되었다.
그해 12월, 평북 만포진 부근에서
권력을 독점하려는 체제에 의해 생을 마쳤다.

- 작가의 글

김규식 선생의 삶은
쉽게 감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차분하게 묻는다.
지금 이 자리에 필요한 것은 분노인가, 준비인가.

말보다 구조를, 외침보다 합심을 말했던 한 사람의 생애는
오늘의 역사 앞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남긴다.
그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 일,
그 자체가 선생의 삶을 기억하는 가장 정직한 방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