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기산도 선생(奇山度, 1878.10.16 ~ 1928)

2025. 12. 5. 14:07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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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기산도 선생(奇山度, 1878.10.16 ~ 1928)

“나라가 무너질 때, 몸 하나로 칼을 든 결기.
쓰러진 곳마다 흔들리지 않는 혼이 있었다.”

- 학문의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 시대의 어둠을 가장 먼저 느끼다

기산도 선생은 1878년 전남 장성군 황룡면의 행주 기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집안은 기삼연 의병장, 성재 기우만, 송사 기정진 등 수많은 의병과 학자를 배출해낸, 조선 후기에 손꼽히는 지성의 가문이었다.
어린 기산도는 다섯 살부터 글을 깨치고 문장에 뛰어났으며, 자연스레 “나라의 운명을 삶의 근심처럼 품는 집안의 분위기” 속에 자라났다.

십여 년 뒤, 그는 훗날 전라도 의병의 상징이 되는 **고광순 의병장(연곡사 전투에서 순국)**의 사위가 된다.
이 인연은 그가 의병의 길을 선택하는 데 큰 흐름이 된다.

-교사에서 계몽가로, 계몽가에서 무장 투쟁가로

청년기 기산도는 기독교계 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며 교육과 계몽에 뜻을 두었다.
그는 고향 장성에 자강회를 조직하여 젊은이들을 모아 교육하고, 무력 항쟁을 대비하는 정신적 토대를 마련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기산도는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장성–광주 고개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다수의 적을 쓰러뜨렸으나 우리 측에서도 세 명이 전사하는 치열한 전투였다.
이 무렵부터 그는 “학문으로 나라를 구하던 사림의 길”에서 “무력으로 나라를 지키는 결사대의 길”로 옮겨간다.

-을사늑약, 조국이 짓밟힌 날 — ‘을사오적단’ 결성을 결심하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다.
조선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사실상 식민지로 떨어졌다.

기산도는 그 길로 상경해
이범석·서상규와 함께 ‘매국원흉 처단단’,
즉 **을사오적단(乙巳五賊團)**을 조직한다.
오늘날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초기의 의열투쟁”으로 언급되는 사건이다.

그들은 자금을 모으고, 무기를 구입하고, 표적을 정하고,
손성원·박용현·김필현·이태화 등을 파견해 을사오적의 움직임을 은밀히 추적했다.

그러나 결사대 본부가 일제에 발각되며, 기산도는 동지들과 체포된다.
모진 고문에도 그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한 달 만에 풀려난다.

-1906년 2월 16일, 군부대신 이근택 집을 습격하다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906년, 기산도는 구완희·이세진 등과 함께 을사오적 중 하나인 군부대신 이근택의 집을 습격한다.

밤 12시, 이근택이 막 잠자리에 들던 순간
양복 차림의 세 사람—그중 선두는 기산도였다—이 방으로 돌입했다.

한 명이 이근택의 팔을 붙잡자
다른 한 명이 칼로 연달아 찔렀다.
불이 꺼지고 칼날이 어둠 속을 가르며 이근택의 몸을 10여 차례 베었으나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하인과 경비가 들이닥치자 그들도 칼로 제압한 뒤
기산도 일행은 이미 벽에 걸어둔 밧줄을 타고 담장을 넘어 사라졌다.
당시 신문 《대한매일신보》는 이 장면을 “이씨 봉자(李氏逢刺)”라는 제목으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그의 탈출은 오래가지 못했다.
현장에서 떨어진 가발 한 가닥이 그의 신원을 들키게 했다.

체포된 기산도는 이근택 앞에서도 담대했다.

“너희 오적을 죽이려는 이가 어찌 나 뿐이겠는가.
다만 일이 서툴러 마무리하지 못한 것만이 한스럽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의병장 기삼연의 후계자로 — 다시 무장 항쟁 속으로

2년 반의 옥고를 치른 뒤 석방된 기산도는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와
재종조부이자 의병장인 기삼연을 이어 장성 일대에서 의병 투쟁을 전개한다.

그러나 의병장으로 살아가는 삶은 숨어 다니는 삶이었다.
일제의 감시는 점점 더 촘촘해졌다.

1916년 이후 그는 전남 고흥군 도화면 당오리에서
낮에는 머슴살이를 하고
밤에는 사랑방에서 서당을 열어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항일정신을 전했다.

-끝내 꺾이지 않은 사람 — 혀를 깨물고 잘라버린 결기

1920년, 그는 다시 체포된다.
그의 옷에서 ‘연판장’이 발견되자 일제는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고문에 굴복하라는 일경의 추궁에
기산도는 단 한마디만 남겼다.

“개 같은 너희에게 어찌 자백하랴.”

그리고는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잘라버렸다.
입을 열지 않기 위함이었다.

일제는 놀라워했고, 분노했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를 광주형무소로 옮겨 더 혹독한 고문을 이어갔다.

- 부서진 몸, 흩어진 삶 — 그러나 끝까지 나라를 품고

5년의 옥고 끝에 출옥했을 때
기산도 선생의 몸은 이미 반신불수가 되어 있었다.

그는 고흥 당오리를 떠돌며
가난 속에서, 병 속에서, 추격 속에서
“나라가 언젠가 반드시 일어날 것”을 굳게 믿었다.

1928년, 51세.
숨을 거두며 남긴 마지막 말은 간명했다.

“유리언걸지사 기산도지묘
(流離焉乞之士 奇山度之墓)”

떠돌이 의사 기산도의 묘—그저 이것 하나만 남기게 하라.

그의 유언을 따르듯, 그의 생은 떠돌았고
그의 뜻은 결코 떠돌지 않았다.

1963년 그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1967년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장인 고광순 의병장의 따님과 함께 쌍분으로 모셔졌다.

-작가의 글

기산도 선생의 생애를 길게 따라가면 한 가지 모습이 끝내 흔들리지 않는다.
몸은 수없이 쓰러졌으나, 마음이 먼저 꺾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나라가 기울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던 시대에
그는 칼을 들었고, 교육을 펼쳤고, 숨었고, 다시 일어섰다.

그 삶이 거칠게 부서져 갈 때조차
근본은 오히려 더 단단해졌고
이름도 남김없이 사라질 수 있는 자리에서
“진실한 의로움”만을 택했다.

한 시대의 어둠을, 말보다 먼저 칼로 갈랐던 사람.
그리고 칼보다 먼저 신념으로 버텼던 사람.
기산도 선생의 험난한 길 위에는
나라를 잃은 민족이 어떻게 다시 자신을 세워야 하는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진실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오래도록 빛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