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정이형 선생(1897.9.16 ~ 1956.12.10)

2025. 12. 15. 01:09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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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정이형 선생(1897.9.16 ~ 1956.12.10)

반듯하고 치열한 항일의 길, 고려혁명당의 중심에 서다

정이형 선생의 삶은 처음부터 조용하지 않았다.
항일 무장투쟁에 몸담았던 김평식으로부터 한학과 항일의식을 전수받았고,
친형 역시 독립운동에 나서 있던 집안에서
선생은 일찍부터 나라의 아픔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였다.

1919년, 전국을 뒤흔든 3·1운동의 물결 속에서
선생 또한 거리로 나섰다.
만세의 함성은 곧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외침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절실함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선룡사립보통학교를 세웠다.
교실은 작았으나 뜻은 컸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글을 배우는 동시에
자기 이름과 겨레의 이름을 함께 배워갔다.
민족 교육은 선생에게 또 하나의 항일이었다.

이후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아래
의주 군감으로 활동하다 중국으로 망명했다.
망명은 도피가 아니었다.
더 넓은 전선으로 나아가기 위한 선택이었다.

중국에서 선생은 대한통의부 의용군에 합류해
직접 항일전쟁에 참전했다.
이어 정의부 의용군 중대장이 되어
국내 진공 작전을 이끌며
일본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무장투쟁의 선두에 섰다.

1926년 3월 하순,
선생은 정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으로
소대장 김형명과 병사 20여 명을 이끌고
길림성 일대로 잠입했다.
한인 동포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으는 한편,
독립군의 동정을 엿보던 친일 밀정에게
단호한 처단을 명령했다.
투쟁의 현장은 늘 냉정한 결단을 요구했다.

이후 고려혁명당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던 선생은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감옥에서도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선생과 동지들은 옥중투쟁을 이어갔고,
1927년 12월 19일부터 열린 신의주지방법원 공판에서는
신문에 대해 일체 묵비권을 행사하며
법정을 또 하나의 전선으로 만들었다.

1928년 2월 8일 공판.
일제의 재판정에서 선생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하고자 하는 바를 했을 뿐이다.”

그 한마디는 변명이 아니었고,
항변도 아니었다.
자신의 삶 전체를 요약한 문장이었다.
그 뒤로 선생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은 가장 강한 항의가 되었다.

결국 선생은
1928년 3월 사형을 구형받고,
4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 공주형무소로 옮겨지며
무려 19년 가까운 옥고를 치렀다.

긴 세월의 감옥은 몸을 갉아먹었으나
뜻까지 꺾지는 못했다.
1945년 8월 17일,
광복 이틀 뒤에야 선생은 감옥 문을 나섰다.
밖에는 해방된 조국이 있었고,
그 안에는 끝까지 굽히지 않은 한 사람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 작가의 글

곧게 선 삶은 소란을 만들지 않는다.
다만 오래 남는다.
정이형 선생의 발걸음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한 번도 비켜서지 않았다.
침묵으로, 교육으로, 그리고 긴 옥중의 시간으로
선생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지켜야 할 것은 끝내 지킨다는 약속.

그 반듯함이 오늘의 숨결 속에서도
조용히 이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