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문양목 선생

2025. 12. 29. 18:40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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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문양목 선생

동학의 불씨를 태평양 너머까지 옮긴 사람

태백산을 노래하던 시 한 편에는 선생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산과 물을 묻고, 선조의 자취를 부르며, 청년들에게 전진을 당부하는 목소리. 문양목 선생의 시는 노래이기 전에 선언이었다. 강식약육의 시대를 건너기 위해, 뜻을 태산처럼 세우라는 경계였다.

선생의 뿌리는 깊었다. 목화씨를 들여와 백성의 삶을 바꾼 문익점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탐관오리와 무능한 권력이 민중을 짓누르던 때 동학농민운동에 몸을 던졌다. 그 싸움은 가혹했고, 선생의 아내는 전투 중 목숨을 잃었다. 개인의 상실은 곧 결단으로 바뀌었다. 남은 삶을 온전히 조국에 바치겠다는 맹세였다.

선생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흘린 땀은 생계를 위한 노동이자 독립의 씨앗이었다. 동학농민운동 출신들과 뜻을 모아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대동보국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이들은 기관지 **〈대동공보〉**를 발행해 국내외 동포에게 독립의식을 일깨웠다. 글은 무기였고, 신문은 전선이었다.

1908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가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망언을 내뱉었다. 미주 한인 사회는 분노했고,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특사를 보내 정정과 해명을 요구했다. 거절은 사태를 키웠다. 이후 벌어진 전명운·장인환 의사의 의거는 우발이 아니었다. 공동체의 판단과 책임이 이어진 결과였다.

스티븐스 처단 뒤, 문양목 선생은 즉시 변호인단을 꾸렸다. 재판 후원과 경비 조달, 변호사 교섭까지 도맡아 두 의사의 싸움이 고립되지 않도록 지켰다. 선생의 역할은 늘 뒤에서 빛났다. 이름보다 일이 앞섰고, 명성보다 책임이 먼저였다.

그 이후에도 선생은 미주에서 한인 사회를 묶고, 검소한 삶으로 독립의 불씨를 지켰다. 태백산을 노래하던 그 마음은 태평양을 건너서도 식지 않았다. 시의 후렴처럼, “내나도 네나도” 모두가 단군의 자손임을 잊지 않게 하려는 집요한 노력이었다.

작가의 글
역사는 때로 큰 장면보다 꾸준한 뒷일로 완성된다. 노동으로 모은 자금, 신문으로 이어진 설득, 재판을 지탱한 연대.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엮어낸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오늘의 자유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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