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지섭 선생(1884.7.21~1928.2.20)

2024. 2. 20. 08:59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728x90

독립운동가 김지섭 선생(1884.7.21~1928.2.20)

일본 왕궁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  

"이번 내가 취한 행동은 침략정치에 도취되고 있는 왜국 관민을 각성시키고 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한국 사람은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선언서에서도 명시한 바와 같이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항쟁할 것이다"


김지섭 선생은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사서삼경에 능통했던 수재였습니다. 일본어를 1달 만에 익혀 상주보통학교 교사가 되었고 독학으로 금산 지방 법원의 서기 겸 통역으로 일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법률사무소를 그만두고 모든 것을 뿌리친 채 오로지 독립운동만을 할 것을 결심하였고 대구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였습니다. 그 후 일제치하에있는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이 어렵게 되자 국외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1920년 5월 단신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로 갔습니다.  그 후 만주와 시베리아 등 각지를 다니면서 조국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하고 있던 중 상해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여 단장 김원봉과 함께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을 계획하였습니다.

이 무렵 일본에서 관동대지진(1923. 9. 1)이 발생하여 민심이 흉흉하고 유언비어가 성행하자 일제는 정부에 대한 일본 국민의 불만을 해소하고 민심 수습책의 일환으로 한인(韓人)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후 무고한 우리 교포 6,600여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같은 한인 교포들의 비참한 소식이 전하여지자 조국독립을 위해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던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온국민이 분개하게 되었는데 이런 민족적 분노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의열단은 1924년 동경에서 일제 총리를 비롯한 여러 대신과 함께 조선 총독이 참석한다는 것을 신문보도를 통해 입수하게 되었고 이에 의열단원들은 폭탄을 던져 일제의 주구를 처단하고 일제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림으로써 이 기회에 관동대지진으로 학살된 우리 동포들의 원혼을 달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지섭 선생은 의열단장 김원봉에게 일본말에 능숙하고 일본인과 비슷하게 생긴 본인이 최적임자라고 이야기하고 본인이 가겠다고 자원하고 나섰으며, 이에 의열단에서는 의사를 일본에 특파하여 거사를 실행할 결사대원으로 임명하여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이때 의사에게는 3년 전에 최윤동(崔允東)으로부터 받은 폭탄 3개가 있었는데, 폭탄을 지니고 일본에 잠입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의 심장부인 동경 국회 의사당에 들어가 일제주구를 처단하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선생은 일본인들이 숭배하는 왕궁 부근에 폭탄을 던져 일본인을 놀라게 함은 물론 일제의 침략상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고 한국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호소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왕궁에 폭탄을 던져 성공한다면 제국의회의 거사 보다 더 큰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1월 5일 동경에 도착한 선생은 오전 11시경 여관을 나와 동경시의 지도를 구입하고 의거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일비곡(日比谷), 이중교(二重橋), 앵전문(櫻田門) 부근을 세밀히 답사한 후 왕궁과 가장 가까운 다리가 이중교라는 것을 확인하고 이날 오후 7시에 때마침 지나가던 구경꾼 2명과 동행인 것처럼 가장하여 이중교로 접근했습니다. 그 부근을 배회 하면서 적당한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 부근을 순찰하고 있던 경관이 다가와서 이제 밤이 되어 구경할 수 없으므로 속히 돌아가라고 하자 동행하던 2명은 즉시 그 자리를 떠났지만 선생이 머뭇거리며 서성거리고 있자 이중교 입구를 경계하고 있던 일비곡경찰서 순사 강본번영(岡本繁榮)이 “당신은 누구냐”라고 수하하고 선생을 붙들려고 할 때 재빨리 폭탄 한 개를 던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도화선의 고장으로 뇌관만 발화 하였을 뿐 폭발되지 않았고, 의사는 기지를 발휘하여 쏜살같이 호위경관을 밀치고 다리의 중앙까지 돌진하였을 때 성문을 지키고 있던 근위병들이 달려 오므로 나머지 폭탄 2개를 이중교 한복판에 던졌으나 이번 또한 약한 소리의 폭음만 내고 불발되고 말았습니다. 의사가 던진 폭탄은 상해에서 선편으로 올 때 장기간 배 밑 창고에서 보내는 동안 폭탄에 습기가 배여 있어 그 기능이 작동되지 않아 불발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러는 사이 3, 4명의 근위병들이 달려와 의사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만 피체되어 일비곡 경찰서에 구금되었습니다.

비록 거사는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이 사건이 일제에게 주는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검찰총장 및 고위 검사 및 경찰들이 전부다 일비곡 경찰서로 오게되었고 그 어느때보다 일본경찰 헌병들의 계엄차량등이 동경 전 시가지를 누비었으며 악독한 고문에 8개월이나 시달렸습니다.

이때 유학생 학우회, 기독교 청년회, 천도교 청년회 등에서 사식(私食)을 차입하는 등 한국 청년들이 따뜻한 동포애로 보살펴 주자 선생는 동포의 온정에 대해 감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고 합니다.

1924년 9월 9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1차 공판이 개정되었는데 예심기간 동안 갖은 고문으로 심신이 피폐하여 지쳐 있었지만 일제 판사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독립의지를 피력하였다 동년 10월 11일에 열린 2차 공판에서 의사는 7, 8매나 되는 장문의 진술서를 펼쳐 들고 ‘우리 조선에 대한 일본 정부의 학정을 논박하고’라고 일제의 침략 식민정치를 통박한 다음 이어서 ‘이번 내가 취한 행동은 침략정치에 도취되고 있는 왜국 관민을 각성시키고 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라고 당당한 어조로 소신을 밝혔습니다. 또한 ‘속지말고 일치 협력하여 세계평화를 유지하려는 큰 이상에서 이 일을 감행하였다'라고 비통한 어조로 역설하였습니다. 이때 방청석은 발 들여 놓을 틈 없이 초만원을 이루었으며 경계가 삼엄하였는데, 선생은 이어 총독정치의 악랄성과 비인간성을 폭로하고 동양척식의 착취와 동포생활의 빈곤을 들어 일제의 학정을 통박한 다음 ‘한국 사람은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선언서에서도 명시한 바와 같이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항쟁할 것이다’라고 1시간 20분 동안이나 열변을 토하여 법정을 아연실색케 하였습니다. 끝으로 의사는 사형이 아니면 무죄 석방하라고 주장하였는데 일제 검사는 왕궁 침입은 국가에 대한 반역임을 들어 의사에게 사형을 구형하였고 이 자리에서 일본인 인권 변호사 후세 다쓰지가 일제의 학정을 사실 그대로 논박하며 폭탄의 불발 등을 증거로 하여 의사의 무죄를 주장한것도 유명합니다.

동년 10월 16일에 열린 3차 공판에서 재판장이 선생의 답변을 허락하자 선생은 분연히 일어나 말하기를 ‘우리 한국인은 굶어 죽고 맞아 죽고 하는 가운데 나 홀로 적국에 들어와 사형을 받는다 하는 것은 진실로 넘치는 영광이다’라며 유창하게 답변을 마치고 의연한 태도로 앉았습니다. 3차에 걸친 공판 후 선생은 동년 11월 6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받습니다.

이중교 투탄의 실패와 일제의 처사에 분개한 의사는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북해도 망고(網尻) 형무소로 이감설이 떠도는 가운데 1년만인 1928년 2월 20일 갑자기 옥사 순국하였습니다. 선생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선생의 변호인 후세 다쓰지가 앞장서서 사인을 규명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미 선생의 유해를 화장해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