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1878.11.9~1938.3.10)

2024. 3. 10. 14:42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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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1878.11.9~1938.3.10)

대한제국의 개혁, 계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

도산 안창호 선생은 아마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독립운동가중 한 분 일겁니다.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 선생의 업적으로는 '만민공동회'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배워서 익히는 것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셨죠. 그러나 일본의 야욕이 점점 커지고 친일파등으로 인해 나라가 어려워지자 선생은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임시의정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는데 이 시기에도 선생이 끊임없이 강조한것은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실력을 키우는 것이 독립의 발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의 일환으로 선생은 점진학교, 대성학교, 동명학원등을 차례로 설립합니다.

그 후 미국에서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등 재미한인단체를 조직, 주관하였습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죠? 1920년대는 임시정부가 그런 시기였습니다.

"완전 개혁을 해야한다! 의열투쟁으로 싸우자"고 외치던 '창조파'
"무슨말이냐 어떻게 만든 임시정부인데 아직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현상유지파'
"교육을 통해 지금에서 조금더 개선시키자" 고 말하던 '개조파' 노선이 나뉠 때,

'개조파' 에서 개조론을 주장한 대표자였습니다.

의견을 합치려던 국민대표자회의가 오히려 서로 이렇게 의견이 다르구나를 확인하게된 계기가 되버리자 선생은 이에 실망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이후 일본은 영향력이 있으나 구체적인 체포증거자료가 부족했던 독립운동가들을 무작위로 체포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안창호 선생도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투옥되셨고 고문을 받았습니다. 선생은 결국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간경화와 폐질환 등 기타 합병증으로 출옥직후 바로 사망하셨습니다.  

안창호 선생을 말할 때 우리는 3가지를 기억하면 됩니다. 첫째, 스스로 힘과 실력을 키워 그 실력을 기반으로 할 때만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세상을 보았고, 둘째, 실력 양성론을 함께 주장하여 경제적, 사회적인 실력을 길러야만이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았으며, 셋째 교육을 통한 교육 입국론을 주장하며 각종 학교의 설립과 양성에 노력하였다는 점입니다.

선생은 많은 젊은이와 청년들을 감화시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했고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에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위치한 도산대로(島山大路)와 도산공원은 선생의 호를 따서 이름 지어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