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하락 선생(1846.12.14~1896.7.14)

2024. 7. 15. 00:31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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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하락 선생(1846.12.14~1896.7.14)



경기 영남 누빈 의병장,

인생 마지막 8개월 간의 불꽃 전투



우리 오백 년 예의의 나라가 개나 양 같은

섬나라 오랑캐에게 먹힌단 말인가.

아! 우리 민족은 과연 이 참화를 면치 못할 것인가.

내가 차라리 어복(魚腹)에 장사(葬事)할지라도

도적놈들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

-총상을 입고 강물 속으로 투신하기 전 선생이 남긴 말



일제는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弑害)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아가 일제는 친일내각으로 하여금 을미개혁을 시행케 하고, 그 일환으로 같은 해 11월 15일 단발령(斷髮令)을 강제 시행케 하였다. 이는 밖으로 개혁의 모양새를 갖추어 침략의 독수를 드러나지 않게 하면서, 안으로 한국을 반(半)식민지 체제로 개편하려는 일제의 침략 책동이었다.



이 같은 민족적 수모와 국가적 위기에 당면하여 선생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몰아내고 국모(國母)의 복수를 이루고자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평소 의기 투합하였던 이종 동생 조성학(趙成學)과 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의 동지들과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거의하기로 결정하고, 서울을 빠져 나왔다.



서울의 코 앞 경기도 이천에서 포군들을 중심으로 900명을 모아 강력한 전투력 갖췄다.  의진 편성이 끝나자 선생은 곧 친일정권과 일본군 타도에 나섰다. 그리하여 같은 해 1월 18일 백현(魄峴)에 매복하고 있다가 이천으로 공격해 오는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을 사방에서 협공하여 수십 명을 사살하였고, 패주하는 잔여 병력을 광주 노루목[獐項] 장터까지 추격하여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첫 번째 전투에서 벌인 대대적인 승리의 경험은 이천의진이 최후까지 항전할 수 있는 정신력의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의병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백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선생의 의진은 2월 12일 새벽 병력을 보충하여 재차 이천으로 공격해 오는 일본군 수비대 200여 명을 맞아 이현(梨峴)에서 이틀 동안 대접전을 벌였다. 하지만 화력이 열세한 상태에서 눈보라까지 몰아쳐 눈을 뜰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선생은 후일을 기약하며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현 전투에서 패전한 선생은 의진을 재정비하고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해 2월 14일 여주에서 거의한 심상희(沈相禧) 의병장을 방문하여 이천에서 함께 활동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승낙을 얻은 뒤, 잔여 병사들과 여주의진을 합쳐 제2차 이천수창의소를 조직하였다. 이 의진은 민승천 대신 박주영(朴周英, 혹은 朴準英)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심상희를 여주대장으로 하였으며, 그밖에는 초기 지도부와 조직 편제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 이렇게 의진을 재정비한 선생은 2월 28일 근거지를 이천에서 광주의 남한산성으로 옮겨,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심진원(沈鎭元)이 이끌던 광주의진과 이석용(李錫容)이 지휘하던 양근의진과 합세하여 남한산성연합의진을 결성하였다. 이때 병력은 1,6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이 의진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정국변화와 단발령 폐지라는 명분 상실에 따라 다수의 유생 의병장들이 자진하여 의진을 해산하여 갔지만, 선생은 왜적 구축(驅逐)과 국모 시해에 대한 복수를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의병 해산이란 있을 수 없음을 거듭 주장하면서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이 연합의진은 3월 5일 남한산성을 침공하는 적 500여 명과 공방전을 벌여 일방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고무된 선생 등 남한산성연합의진의 지도부는 3단계의 서울진공계획을 수립ㆍ추진하였다.



이 같은 서울진공계획은 한말 의병투쟁사에 있어서 최초의 서울진공작전이었으며, 대규모의 병력이 참여한 점에서 특별한 의의가 있다.



이천의진의 창의대장으로 추대된 후 새로운 전투 배후지 영남으로 이동하였다. 또한, 장현, 의흥, 청송, 비봉산 등 곳곳에서 적군을 격파하였고 각지에서 군수 물자를 보충 받아 경주연합의진을 결성, 경주성을 함락시켰다.



선생은, 잔여 병력을 이끌고 달성(達城)․기계(杞溪)․흥해(興海) 등지를 경유하여 6월 29일 영덕에 도착하였다. 이동 중에 선생은 기계에서 흩어졌던 병사들을 모으고, 흥해와 영덕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의진을 다시 정비 확충하였다. 그리고 7월 5일 영해의진과 합세하고, 7월 9일 유시연(柳時淵)의 안동의진과도 합진함에 따라 선생의 의진은 대규모의 연합의진을 형성하였다. 선생은 이 연합의진을 동원하여 영덕 관아를 공격할 계획을 수립하고, 7월 14일 영덕에 도착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때 적군 수백 명이 일시에 기습하여 왔다. 그리하여 선생은 연합의진을 이끌고 이들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의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선생은 이 와중에서도 전투를 계속 독려하다가 2발의 탄환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이에 선생은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내겠다”고 하면서 강물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그리고 다시 영남으로 이동하면서 약 8개월 동안 줄기찬 투쟁을 벌였던 선생의 의병 활동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굵고 큰 이정표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