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홍범식 선생(1871.7.23~1910.8.29)

2024. 8. 29. 09:55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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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홍범식 선생(1871.7.23~1910.8.29)

경술국치 당일, 순국의 길을 택하다


홍범식 선생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명문가 집안의 자제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조선후기 정조대왕의 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집안이였죠. 조선후기 대푲거인 명문가 집안으로서,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의 교리였던 성리학을 공부하던 학자였기에 선생은 충효와 의리를 최고의 덕목이자 신념으로 살았습니다.

17살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34살이 되던 1905년 11월 을사늑약의 체결소식에 비분강개하게됩니다. 그러던 도중 선생은 태인군수로 임명이 되었으며 의병부대를 진압하러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를 모든 것을 다해 설득하고 막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태인군에 있던 무고한 백성들까지도 일본군 수비대가 학살과 폭력을 일삼았기에 피해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군수로 재직하면서 이러한 그의 노력에 감동한 지역 주민들은 마을마다 선생을 기리는 비를 세웠고 그 수가 무려 38개에 이르게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홍범식 선생의 인품과성품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발생한 사건,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 이 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국권을 상실하게됩니다.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한가지는 친일파 이완용과 밀접한 관련이있습니다. 아마 이 부분은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아 잘 모르실겁니다. 1909년 12월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 처단 작전을 실행하였고 안타깝게도 칼에 맞은 이완용은 살아나게 됩니다. 미수 사건으로 그쳐버린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친일단체였던 일진회를 통해 마치 우리나라가 한일병합을 원한다. 우리는 일본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청원서와 성명서를 발표하게 합니다.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주장하는 한국은 식민지시대를 통해 발전할 수 있었다는 말도안되는 논리는 바로 여기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아 내가 이미 사방 백리의 땅을 지키는 몸이면서도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조선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선생은 자결, 순국을 결심한 듯 미리 유서를 써 놓았습니다.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자 황제가 있는 북쪽을 향해 예를 표한 뒤 목을 매어 자결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자결한 모습이 마치 자는 듯 편안한 자세였다고 합니다. 이때 선생의 나이 40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