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최운산 선생 – 봉오동 전투의 숨겨진 영웅, 지금의 홍범도-김좌진 장군을 있게 한 숨은 주역

2024. 9. 11. 23:38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728x90

독립운동가 최운산 선생 – 봉오동 전투의 숨겨진 영웅, 지금의 홍범도-김좌진 장군을 있게 한 숨은 주역

최운산(崔雲山, 1885년 ~ 1945년 7월 5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중국 지린성 출신이다. 어릴 때는 최명길(崔明吉), 장작림 군벌에 있을 땐 중국식의 최풍(崔豊), 간도 제1의 거부로서 경제활동을 할 때는 최만익(崔萬益), 무장투쟁을 할 때는 최문무(崔文武)·최빈(崔斌)·최운산(崔雲山)을 사용했고, 러시아에서 무기를 밀매할 때는 최고려(崔高麗), 중국 장사꾼으로 위장해 첩보활동을 할 때 최복(崔福)을 사용했다. 8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모두 한 사람이다


임진왜란 이후 한 일 정규군이 맞붙은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승리는?

학교와 기업에서 역사강의를 하며 위 질문을 던지면 제일먼저 들리는 답변은 ‘청산리 전투!’ 라는 답이었다. 정답은 ‘봉오동 전투’ 이다.

봉오동 전투의 숨겨진 주역에 최진동 선생이 있었고, 만주지역 독립군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들여 군자금과 무기를 제공했던 최운산 선생이 있었다. 이들은 형제다.

최운산 선생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의 이름만 기억되어왔다. 독립운동사 특히 무장투쟁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승리는 한 두 명의 영웅이 만들어낸 신화적인 일들이 아니라, 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뜻을 모아 의로운 희생정신을 보일 때 만들어졌다. 이러한 역사는 수 많은 의로운 선조들의 처절한 삶과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 낸 일이었다.

최운산 선생은 1885년 11월 7일 중국 연길에서 태어났다. 삼 형제는 함경북도 온성  출신으로 무력투쟁만이 국권 회복의 방법이라 굳게 믿고 1908년 청나라 군대에 입대한다. 군인으로서의 실력이 출중했던 형 최진동 선생은 청나라 지방 군대의 고위간부가 되었고, 최운산, 최치홍 선생은 지방 군대의 보위단 간부가 되었다.

최운산 선생은 일단 중국어에 능통했고 중국 고위층 (inner circle) 친구들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떄의 인연으로 중국 정부가 토지 정리 사업을 할 때 고위층 친구들이 선생에게 귀뜸을 해주었고 그로인해 부산 면적의 여섯 배나 되는 벌판을 헐값에 구매하게 되었다. 황무지 벌판이 개간 작업을 거치자 그곳의 땅은 기하급수적으로 값이 올랐고 간도 전체 지역의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다.

군대에서 특히 총술에 능했던 최운산 선생은 간도 지역 중국 군관을 근무 했는데 마적단으로부터 조선인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학교를 설립하고 사병부대를 조직했다. 사병의 규모는 상당했던걸로 보인다. 사료에 의하면 1915년 약 500명에 달하는 부대원이 있었고 그 부대의 이름은 ‘도독부’ 였다.

최운산 선생은 1910년 형 최진동, 동생 최치홍 선생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 만주로 이주한 3형제는 <봉오동사관학교> 라는 부대를 조직,설립하는데 성공한다. 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무장독립투쟁을 준비했다.

앞서 최운산 선생이 엄청난 황무지 벌판을 개간하여 부를 축적했다고 언급했다. 부모, 형제를 포함한 최 씨 집안 모두가 만주 봉오동으로 이주했고 전 재산으로 신한촌(新韓村)이라는 마을을 건설한다. 신한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지 않은가? 최운산 선생은 봉오동 지역을 독립운동 군사기지로 만들려 한 것이었다.

약 5년의 시간이 흘러 드디어 봉오동 산중에 독립군 기지가 완성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의 사병부대인 도독부는 이름을 바꾼다. 그것이 바로 독립군부대 <군무도독부>이다.

최운산 선생은 형 최진동 선생을 사령관으로 추대하며, 본인은 재정과 행정을 책임지는 참모장을 맡았다. 마치 오늘날 CEO의 느낌인데 중요한 것은 참모장 역할과 함께 실 전투요원으로 전투에 참여하고 군사정보 수집등의 활동까지 동시에 수행했다는 점이다.

최운산 선생은 독립군들에게 무기를 보급하기 위하여 수 많은 이름들 (풍, 빈, 고려, 명길, 만익, 문무)을 수시로 사용하며 활동했다. 봉오동 전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이 평소 군사정보 수집활동을 통해 일본군의 계획을 사전에 입수하는데 성공하면서 미리 매복 작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물론 매복 작전이라는 것이 승패를 확신할 수 는 없지만, 전쟁 상황에서 상대방의 이동계획을 미리 파악한다는 것은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는데 이견을 가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최운산 선생의 아내 김성녀 선생의 이야기다

“남편은 한 푼의 찬조금 없이 사비로 장비, 피복, 식량을 조달했다. 대포 6문, 장총 500정, 권총 수십 정, 실탄 수만 발, 수류탄 수백 개…”

최 씨 3형제의 군무도독부, 홍범도 선생의 대한독립군, 안무 선생의 국민회군, 만주지역 무장독립군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독립투쟁사에서 가장 통쾌하고 화려한 역사를 만들어내던 이때 이 분들은 어떤 희망과 미래를 꿈꾸었을까?

근현대사를 아는 사람들은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가장 가슴아픈 자유시 참변이라는 말을 들어본적 있을 것이다. 엄청난 희생과 노력의 산실인 독립군들, 어떻게 키운 독립군인데, 독립군들끼리 자중지란이 되버려 결국 서로에게 총을 들이미는 최악의 사태… 무려 1000명 이상의 독립군이 서로를 향해 총을 쏘고 상대의 무기를 빼았아갔다. 기록에 따르면 독립군 960명 전사, 1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봉오동 전투가 1920년 6월에 발생했으니 이때로부터 정확히 1년 후 이러한 최악의 사건이 발생 한다는 걸 이때 이 분들이 알았다면 어떠했을까? 많은 생각과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스쳐가고 상상이 된다. 독립운동사는 알면 알수록 콘텐츠의 보고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실제 이야기들이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어 문화 콘텐츠의 힘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군무도독부,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무장독립군들은 서로 힘을 합쳐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설립한다. 대한군북로독군부의 모든 군수물자와 보급식량은 최운산 선생이 조달했다. 이 어마어마한 군수물자금을 지원하기위하여 선생은 부산 여섯 배에 달하는 토지를 전부 팔고 그 땅에 있던 공장을 전부 매각했다.

이러한 자금을 운용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승전과 역사에 남은 영웅들이 지금처럼 온전히 기억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 100% 기억되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에 군수물자가 없고 자금이 없다면 그곳에는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만이 남을 뿐이다.



잠시 봉오동 전투에 대해 살펴 보려한다. 1920년 6월 4일 당시 만주에서 활동 하고 있던 독립군 부대는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위치한 일본군 순찰소대를 급습한다. 적당히 혼을 빼어놓은 뒤 독립군 부대는 일사 정연하게 퇴각한다. 일본군 소대는 당혹스러움과 분함을 참지 못하고 독립군 부대를 추격한다. 두만강 너머까지 쫓아오자 매복하며 기다리고 있던 후발 독립군 부대가 측면에서 습격후 다른 방향으로 퇴각한다. 함경북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사단을 1개 대대 전체를 보내 봉오동으로 진격한다.

봉오동 지리에 누구보다 익숙했던 최운산, 최진동 형제는 이 모든 것을 작전을 준비하고 계획했다.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 1개 대대가 분지 안으로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총공격을 퍼부었고 아군 전사자 3명, 일본군 전사자 157명, 부상 10명의 대승을 거둔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1592) 이후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승리였고 이 일로 인해 일본군은 독립군을 결코 얕잡아보지 못했다. 봉오동 전투 이후 4개월 뒤 청산리 일대에서 청산리 전투가 일어났고 이때의 주역이 대한독립군을 이끈 홍범도, 북로군정서를 이끈 김좌진, 군무도독부를 이끈 최운산 선생이었다.  연합부대의 총 사령관은 최운산 장군의 형 최진동 장군이었고, 1군사령관은 홍범도 장군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숨은 주역으로 유동하 선생과 우덕순 선생이 있듯이,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의 숨은 주역으로 최운산, 최진동 선생이 있었다는 걸 꼭 알리고 싶었다.

최운산 선생은 청산리 전투 후 1937년까지 여러 차례 투옥과 고문을 겪었으며 1939년 마지막으로 창씨개명 거부와 군자금 모금 사유로 투옥된다. 이때 받은 고문의 여독이 심해 1945년 7월 5일 광복을 겨우 40일 앞둔 때, 아들 최봉우 선생의 집에서 고문 후유증이 재발하여 별세하셨다.

선생에 대해 조사를 하던 중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최진동 선생의 장녀 최경주 여사는 홍범도 장군을 아주바니(큰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동안 못 만났던 홍범도 장군을 봉오동의 집에서 다시 만났을 때 1941년에 최진동 장군이 돌아가신 다음해였기에 연도를 정확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최운산 장군의 손녀딸 최성주 기자의 회고내용을 보면

홍범도 장군은 1943년 크질오르다에서 순국했다. 홍범도 장군이 다녀간 그 다음해인 1943년에 봉오동에 큰 홍수가 나서 봉오동 집이 다 무너지고 토성도 허물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경주 당고모한테 처음 들은 것으로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역사학자들은 노년의 노인이 그 먼 길을 오갔다는 걸 믿을 수 없다고 당고모가 다른 사람을 착각했을지도 모른다고 평가했다.

내가 다시 확인을 요구하자 경주고모는 “내가 열두 살이나 먹었을 때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어릴 때 아버지랑 같이 만나서 그분 무릎에서 재롱떨던 내가 어떻게 홍범도 아주바니를 모르겠냐”고 했다. 당고모는 덧붙여 "아버지는 "안무장군과 홍범도장군이 우리 형제들과 뜻이 잘 맞아 봉오동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렀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그리고 “안무 장군이 당신의 심부름으로 독립군의 유족들에게 생활비 전달하러 갔다가 봉오동에서 멀지 않은 달라재에서 총을 맞고 순국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눈물을 흘리시기도 했다.”고 전했다.

'자유시참변'의 고통을 가슴에 품고 봉오동으로 돌아온 최진동 장군의 형제들은 북만주를 넘나들며 제2의 봉오동을 건설하는 일에 진력했다. 그러나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당시는 이미 만주가 일본의 지휘 하에 있던 시기여서 모든 활동을 비밀리에 해야 했다. 연변 대흥구(대황구), 3만 정보 면적의 임야에 독립군부대를 재창설하고 500여 명이 넘는 병사들이 숨어서 지냈다. 농사꾼으로 변장한 독립군들이 낮에는 군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아편농사를 짓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했다.  (중략……)

최운산 선생의 아내 김성녀 여사는 총무처에 선생의 공적을 인정받으려 노력했는데, 1961년 1월 건국훈장을 주겠다는 연락에 아들 최봉우 선생과 함께 서울에 올라왔다. 그러나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당시 독립운동가의 공훈(서훈) 담당자 였던 총무처 직원은 뒷돈을 요구했다. 참을 수 없는 모욕감. 조국과 동포를 위해 전 재산과 목숨을 바쳤던 아버지에 대한 예우가 처참히 짓밟히는 순간이었다. 아들 최봉우 선생은 그 자리에서 총무처 직원에게 주먹을 날렸고 이 결과로 최운산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지정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16년이라는 시간동안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알려지지도, 서훈을 받지도 못했다.

1977년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셨고, 1990년이 되어서야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접했을 때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정말 그 총무처 직원이 누군지 알 수만 있다면 나 역시 주먹을 날리고 싶다. 그러나 비단 그 사람 한명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16년이라는 시간 동안 선생의 가족께서는 어떤 감정과 생각이 드셨을까? 요즘 흔히 말하는 ‘이것이 나라인가?’ 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이것이 조국이 독립운동가를 대하는 행동인가’라는 질문이 얼마나 많이도 얼마나 오랜 시간 드셨을지 생각하면 너무나 죄송하고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같은 동포로서, 후손으로서 인지상정이 아닐까.

최운산 장군의 손녀딸인 최성주 주주통신원은 다음과 같이 할아버지를 기억한다.

비록 타향이었지만 할아버지의 임종을 곁에서 지킬 수 있었고, 유훈을 들을 수 있었으니 큰아들인 아버지에게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평양비행장 근처의 야산에 할아버지를 모신 아버지는 곧 고향 봉오동의 선산으로 다시 모셔 가리라 생각했다. 1.4후퇴 때 남한으로 피난길을 떠나면서도 전쟁이 끝나고 정세가 안정되면 곧 돌아와 보오동 선산의 증조할아버지 묘소 아래로 모셔 가리라 다짐하며 잘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식을 해두었다. 그러나 3.8선으로 갈라져버린 나라의 운명은 아버지의 평양행을 끝내 막아섰고 할아버지는 지금도 홀로 평양에 계신다.

1950년 일어난 6.25 전쟁으로 인해 장남 최봉우 선생은 끝내 아버지의 묘를, 우리 후손들 역시 최운산 선생을 대한민국 현충원에 안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중국 지린성 봉오동에가면 봉오골 반일 전적지 라고 적힌 기념비가 있고, 지린성 청산리에 가면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가 놓여있다. 이것은 최진동 최운산 형제와 홍범도 장군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이다. 중국에서는 여전히 매년 수 만명이 이곳을 방문하여 예를 표한다

올해 7월 5일이 되면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창립 2주년이 된다

최운산 선생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

“내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 일생 동안 나라를 위해 헌신했고 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고 의롭게 살고자 했으니 부끄러움이 없다. 시대가 격변하고 있고 우리나라의 해방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희 형제들이 지금은 모두 고초를 겪고 있지만 크게 잘못되는 일은 없을 것이니 너무 염려 말라.”

조선의 항일영웅이 왜 중국에서 기념이 되고 있을까 하는 마음이 자꾸만 든다. 물론 전투 지역이 그곳이었다긴 하지만 나는 뭔가 애석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일단 교과서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이 이 분에 대하여 먼저 ‘인지’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된다. 이제는 홍범도, 김좌진, 안무 장군을 넘어서서 최진동, 최운산 장군을 꼭 기억하자.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