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허승완 선생 (1893~1938)

2024. 10. 3. 20:25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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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허승완 선생 (1893~1938)

-조선의용군 조직

-고려혁명군 헌병대장

-대한국독립군 사령관

허승완 선생은 25세의 나이에 1919년 중국 연길현에서 조선의용군을 조직하며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의군부 산하에서 활동하며, 그는 의병들이 통합된 단체를 이끌고 1년 2개월 만에 군세를 확장해 6개 대대로 편성했다. 허승완 선생은 허룽, 왕칭, 훈춘 지역에서 현지 한국 동포들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1919년 7월에는 북로군정서와 동맹을 체결하고, 일본인과 친일 앞잡이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며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을 호소했다. 그는 1921년 자유시참변으로 큰 타격을 입은 후, 1923년에는 만주에서 고려혁명군을 조직했다.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지원을 받아 군을 재조직하며 헌병대장 역할을 맡았다. 이후 그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으며, 그는 일본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허철이라는 이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통영은 애국충절의 고장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지킨 곳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그 시대의 청년들은 바로 눈 앞에 이순신 장군(제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충렬사를 보며 더욱 가슴 한편이 뜨거워졌는지도 모르겠다.




선생은 중국으로 건너가 무장항일투쟁을 펼쳤다.

독립군 부대의 중요한 직책을 맡은 그였지만 국내외에 선생에 대한 자료는 찾아보기 어렵고, 잘 알려져있지도 않다. 실제 사학자들 중, 근현대사 교수중 선생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선생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마땅히 기억해야 할 숨겨진 영웅이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국가보훈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등을 뒤져도 허승완에 관한 사료는 단편적으로만 있을 뿐이다.



이는 그가 항일무장단체의 지도자그룹에는 속했지만 최고수뇌부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이유도 있을 테고, 허승완이 이른바 좌파계열 무장단체에 속했던 바람에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를 잃어버리고 많은 역사적 자료들도 소실돼 버린 이유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나이 24살.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를 확인한 결과 1918년 12월 선생은 중국으로 건너가 러시아 적군의 용병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나온다.


선생의 나이 25살. 선생은 1919년 4월 중국 연길현(延吉縣)에서 설립된 의군부(義軍府)산하에서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을 조직했다. 의군부는 종래 국내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이 동북만주, 중국 동삼성 등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다가 국내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서로 단체를 통합해 만든 것이었다.


허승완, 김청봉 선생은 조선의용군 내에서 직접 전투에 참여하며 활동했는데, 1년 2개월 만에 군세가 확장돼 6개 대대의 큰 규모로 편성되었다고 한다.


주로 허룽(和龍), 왕칭(王淸), 훈춘(珺春)지역에서 활동하면서 현지 거주 한국동포들로부터 독립의연금을 받아 운영자금으로 사용했다.


1919년 7월 중부참모장 고평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동맹을 체결하고 룽징(龍井), 국자가(局子街)등지에서 일본인과 친일앞잡이들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고, 전 만주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단체에 단결과 통일을 호소하기도 했으며, 1920년 8월 하순 조선의용군은 중간촌(中間村)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후 북로군정서가 청산리대첩을 이룬 뒤 밀산(密山)으로 퇴각할 때 행동을 같이 했으며 1921년 자유시참변을 당하면서 러시아군병과 충돌 큰 타격을 받았다.


허승완 선생은 그 후 1923년 만주에서 독립운동단체인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했다. 자금부족으로 식량난까지 겪던 고려혁명군의 소식은 상해임시정부까지 전해졌고, 임시정부가 군자금 50원을 지원해 주면서 청산리대첩의 주역 이범석 장군, 의병장 출신 김규식, 고평 선생 등과 함께 400여 명 규모로 고려혁명군을 재조직하게 됐다. 이때 허승완 선생은 고려혁명군 헌병대장을 맡게 됐다.


이후 선생의 행적은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선생은 허철(許鐵)이라는 이명(異名)으로도 불렸다. 아마 일본으로부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가명을 쓴 것으로 판단된다.





잘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독립운동가 허승완 선생,

후손분의 제보로 33만명의 독립운동가 앱 회원분들께 선생을 알릴 수 있게되었다.

내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