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박열 선생(1902.2.3~1974.1.17)

2025. 1. 18. 10:06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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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박열 선생(1902.2.3~1974.1.17)

일왕암살 누명으로 체포, 22년 2개월의 옥중생활을 하다. 선생의 옆에 있던 가네코 후미코, 그리고 후세 다쓰지도 기억하자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사형판결 직후 일본 재판관에게 한 말


박열 선생이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졸업식날 조선인 선생님의 고백 때문이었습니다. 1916년 3월, 졸업식을 앞두고 선생님이 학생들을 불러 모은 다음 그동안 일본의 압력에 못 이겨서 거짓으로 된 교육을 시켰다며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한 것입니다. 조선역사의 위대함과 전통을 잊지말라는 조선인 선생의 눈물섞인 절규에 당시 10대였던 박열 선생은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공부하여 우리 민족을 위해 큰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3년후, 1919년 3.1운동 만세 시위에 참가한 혐의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신문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당시 고등학교를 다니며 18세의 나이로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조직하였는데, 1923년 4월 가네코 후미코라는 일본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박열 선생을 특이하고 특별한 독립운동가로 만들게 된 시작이 여기서부터인데 일본의 '조선인 학살' 을 피해 피신해 있던 선생을 일본 경찰은 불법 체포를 하였고 고문과 취조도중 선생의 폭탄 구입 계획이 알려지게 됩니다. 일본 정부와 검찰은 이 내용을 일왕을 암살하려한 사건으로 날조하고 과장하여 보도하였으며 '대역 사건' 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황당하게도 이 사건으로 선생은 사형선고를 받게되었고 이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이 됩니다. 일본인 후세 다쓰지의 도움으로 박열 선생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결혼을 하게 되는데 둘의 사진 스캔들 사건이 터져서 일본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킵니다. 담당 판사가 해임되었으며 1926년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자살하였고 1927년 당시 일본 내각은 총사퇴를 하였습니다.

박열 선생은 22년 2개월을 복역하였으며 해방 이후 석방되었습니다. 해방 직후 도쿄로 돌아와 김구선생의 부탁으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 송환의 책임을 맡았으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생했을때 북한에 납북되었다가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 국민들이 모두 서울에 남아있는데 독립투사인 내가 그들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 없다며 서울에 남겠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입장에서는 일본여자 가네코 후미코는 나라를 배신한 여자로 여겨졌지만, 개인적으로 사랑을 선택한 박열 선생의 애국심에 감명받은 여자였다고 생각합니다. 박열 선생의 항일운동은 일본을 없애고 망하게하는것이 아니라 나라를 빼앗긴 자로서 나라를 되찾겠다는 것이었으니까요. 엄밀히 말하면 이 두가지 접근은 완전히 다르기에 가네코 후미코는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행동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우리가 살펴볼 인물이 있는데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중에는 일본인이 몇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후세 다쓰지라는 인권 변호사 입니다. 이 사람을 일본인 쉰들러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조선의 독립운동에 열정적이었고 3.1운동 당시 성명서를 발표하기까지 합니다. 후세 다쓰지는 처음에 검사로 일본 법조계에 입문했으나 법률의 한계와 사회적 약자들에대한 연민으로 인권변호사가 됩니다. 그 후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변호를 주로 맡게되는데 후세 다쓰지가 맡았던 여러 변호중 유명한 것이 바로 박열 선생과 가네코 후미코의 일왕 암살 미수사건입니다.

이러한 파란만장한 개인사와 더불어 자유정신에 입각한 선생의 항일투쟁 이력은 독립운동사에서도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