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명근(安明根 1879년 9월 17일 ~ 1927년 7월 7일)

2025. 7. 9. 09:58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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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안명근 선생
안명근(安明根 1879년 9월 17일 ~ 1927년 7월 7일)



안중근 의사 사촌형제, 독립운동가.

가톨릭 세례명은 야고보.


안명근은 1879년 9월 17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안중근 의사와는 동갑내기 사촌동생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고려 말 이름있던 유학자 안향(安珦)의 후예로 해주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다. 진해현감을 지낸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성품이 어질고 인심이 후하여 해주부내에서 평판이 높았다. 안인수는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는데, 2남 태현(泰鉉)이 안명근의 부친이고, 3남 태훈(泰勳)이 안중근의 부친이다.



해주에 살던 선생은 7살 때인 1885년 황해도 신천군의 청계동으로 이사했다. 어린시절 선생은 사촌형인 안중근과 함께 성장하며 화서학파의 고능선(高能善)에게 전통 한학을 배웠으며 당시 청계동으로 몸을 피해 잠시 머물던 백범 김구와도 만날 수 있었다.



선생은 러일전쟁 직후 한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던 때에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을사늑약으로 조선통감부가 설치되면서 한국은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쓰러져 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선생은 황해도 지역의 대표적인 교육운동단체였던 안악면학회와 이를 확대, 발전시킨 해서교육총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매진했다.



선생이 황해도 해주를 중심으로 교육구국운동에 전념하는 동안 국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일제는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강제 해산시키는 등 한국의 주권수호 능력을 마비시켰다. 이 시기 안중근은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전쟁을 펼쳤고 마침내 1909년 10월 하얼빈 의거를 결행해 세상을 진동시켰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선생은 원대한 계획에 의한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이를 추진해 갔다. 선생은 서간도에 한인청년들을 이주시켜 학교를 세우고 이들을 교육 후 중국의 무관학교에 보내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비롯하여 매국노 이완용ㆍ송병준 처단과 같은 의열투쟁과 일본군에 대한 직접적인 무장투쟁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을 구상했다. 선생의 해외독립운동기지 개척 구상은 신민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민회에서는 해외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해 각도의 대표를 선정하고 각도별 모금액을 결정했다.



선생은 자신의 독립운동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먼저 무기를 구입하고 동지를 규합했다. 박만준ㆍ이승길 등의 동지와 함께 안악ㆍ신천 등의 부호를 찾아 1만원 정도의 자금을 거두었다.



선생은 황해도 일대에서 해외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한 준비 단계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10년 11월 황해도 신천의 민병찬과 민영설 등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였다. 민병찬 등은 이를 일제 헌병에게 밀고하면서 선생은 1910년 12월 사리원에서 평양으로 가던 중에 일경에게 붙잡혔다. 일제는 1911년 1월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참여한 동지들을 모두 붙잡았다. 이것이 안명근사건이다. 일제는 가혹한 고문을 가하는 한편 이들을 강도 및 강도미수사건으로 확대ㆍ과장하였다. 선생은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일제는 이 일을 의도적으로 확대하여 황해도의 신민회 관계자 160여 명을 붙잡아 수감하는 안악사건을 조작하였고, 또 한편으로 신민회의 주요 간부들이 테라우치 조선총독 처단을 기도했다고 날조했다. 이것이 테라우치총독암살음모사건 또는 105인사건으로도 불리는 것으로 일제가 독립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탄압을 위해 날조한 대표적 사건이다.



종신형을 언도받은 선생은 15년의 옥고를 치르다가 1924년 출옥했으나 옥중 여독으로 고생하다가 1927년 7월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