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심남일 선생(~1910.10.4)

2023. 10. 5. 05:21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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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심남일 선생(~1910.10.4)

남도 제일의 의병장

초야의 서생이 갑옷을 떨쳐 입고 / 말을 타고 남도를 바람처럼 달리리 / 만약에 왜놈을 소탕하지 못한다면 / 맹세코 모래밭에 죽어 돌아오지 않으리.

- 1907년 의병으로 나서면서 지은 선생의 시-


을사늑약을 계기로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자 심남일 선생은 의병만이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몸과 안위보다도 위태로운 국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질 각오를 한 것입니다. 특히 을사늑약 이후 풍전등화의 위급한 시국과 을사오적의 농간에 나라가 완전히 망하게되자 이에 비통함을 금치 못하고  장차 의병을 일으켜 국권을 되찾을 결심을 더욱 단단히 굳혔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자력으로 의병을 일으킬만한 처지가 못되었습니다. 명성이 높은 유학자도 그런 집안도 아니었으며, 재력이 탄탄한 부호도 아니었기 때문이였죠. 하는 수 없이 선생은 1907년 후반 전라남도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던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였습니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약 5백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당시 전라도에서 가장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고 이들은 특히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일제 군경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던 시기였습니다.

일제는 끊임없이 의병부대의 독립운동가들을 회유하는 회유정책과 강력한 탄압을 동시다발적으로 펼치며 우리의 정신을 압박하였습니다. 결국 1908년 2월에 호남창의회맹소의 의병장들이 줄줄이 체포, 총살되거나 전사하였습고 이에 와해지경까지 갔던 의병부대를 심남일 선생은 굳건한 항일의지로 의병을 다시 불러모아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게됩니다. 교편을 잡던 서당 훈장에서 의병대장으로 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전국의 동포들은 다같이 풍파를 만난 배를 탄 신세입니다. 그런즉 앉아서 고래 떼처럼 악독한 왜놈들에게 잡혀 먹히기 전에 서로 분발하여 의병을 일으켜 그들을 쳐부순다면 우리 강토를 회복하고 종묘사직을 안정시키는 일은 오늘의 거사에 달려 있습니다.(…)엎드려 바라건대 조정의 벼슬아치나 산림의 숨은 인재들은 저더러 그러한 자격이 못 된다고 하지 말고 각자 의분심을 일으켜 함께 큰 일을 치루어 나간다면 천하 만국이 또한 반드시 우리를 호응하게 될 것입니다.-심남일, [격고문]-

전라남도의 중남부지역을 근거지로 의병부대들간희 연합을 주도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해가던 선생의 존재는 일본군에게 는 말그대로 눈엣가시와 같았습니다. 일제는 결국 1908년 후반부터 선생의 체포에 혈안이 되어 '일진회' 멤버들로 구성된 정찰대를 이용 의병진압을 실시하였습니다. 이 때 11개 부대가 심남일 선생의 의병부대를 진압하기 위해 동시에 출동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체포된 선생 등 은 광주감옥에 갇혀 일제의 모진 심문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굳건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왜적과 매국노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 첫 번째 한이요, 노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한이며, 죄 없는 의병들이 갇혔으나 구해주지 못한 것이 세 번째 한이고, 죽은 후에 순절한 충신들을 볼 면목이 없는 것이 네 번째 한이다."

선생은 체포된 지 약 1년 만에 죽음을 맞이하였으으며 감옥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해와 달처럼 밝고 밝던 우리 강산이 갑자기 비린 먼지 속에 묻히고 말았네 맑은 하늘 보지 못하고 지하로 가노니 붉은 피 한에 맺혀 푸른 피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