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5. 23:00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채응언 선생(~1915.11.4)
국권이 강탈된후 역사상 가장 긴 의병 활동 펼친 청춘
"헐벗은 옷 조악한 밥을 달게 여기고, 부하와 침식을 함께하며, 재물은 털끝도 범한 바가 없다. "
역사상 가장 긴 의병 활동을 보여준 의병장 채응언 선생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독립운동가중 한 분입니다. 8년 이라는 시간동안 의롭고 담대하며 기민하게 활동한 선생은 민중의 지원을 암암리에 받았고 이로인해 일제는 선생의 의병부대를 매우 어려워했습니다. 나라가 어려워지자 무기의 열세에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물결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군인들에게 그 의지가 이어져 내려오게 됩니다.
채응언 선생은 실제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실제 서거일만 기록되어있으며 역사적 전후관계를 고려해 선생이 1883년도에 태어났다고 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출생지는 기록마다 달라 말들이 많지만 선생이 체포된 지역이 평안남도 성천군이었기에 그곳에서 태어나셨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선생은 의병 활동을 하기 전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생활고에 허덕이며 농사를 짓고 힘들게 생계를 꾸려가던 농부였습니다. 그러나 어릴적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성실하게 농사를 짓던 선생은 나라가 어려워지자 호미를 내려놓고 돌과 총을 들고 일본군을 상대로 역사상 가장 오랜시간 피해를 입힌 전설적인 의병장으로 변신합니다.
선생이 10살이 되던 해, 우리나라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전국을 휩쓸게 되었고 세계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탈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와 수탈, 그리고 이어지는 을사늑약 및 을사5적의 소식에 선생은 다음과같이 말하며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난신적자가 횡행하여 권세를 희롱하므로 송병준(宋秉畯)•이완용(李完用)과 같은 7적(賊)•5귀(鬼)의 살점은 2천만 동포가 모두 씹어 먹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선생은 의병을 일으킬만한 학문적 존경, 경제적 부유함 그 어느 것도 없었기에 우선적으로 다른 의병부대에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역사에 의하면 1907년을 기준으로 선생의 의병활동을 추정하는데 군대가 강제해산된 시점을 기준으로 선생의 활동이 기록되는 점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처음에는 가난한 농민의 한사람으로 인식되어 의병부대에서도 잡일을 도맡았으나 금방 그의 능력과 잠재력을 알아본 의병장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포수 들을 모집하는 역할인 소모장 직책을 맡게 되었고 부대장이 순국하자 그 역할을 승계하며 활약을 합니다.
1908년 선생은 처음으로 자신의 의병부대를 만들었으며 도탄에 빠진 인민을 구하고 국권을 회복하기위해 모든 동포들이 의병이되어 싸우자고 호소하였습니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최대 5백명 정도였으며 소리소문없이 일제 건물을 파괴하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게릴라전을 오랜시간 하였습니다. 특히 황해도, 함경남도, 강원도 지역을 지속적으로 옮겨다니며 전투를 벌였습니다. 일제가 선생의 의병부대를 진압하기위해 보병사단을 투입하여 진압작전을 펼쳤어도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선생의 부대가 소수정예의 유격전(게릴라전)을 효과적이고 전략적으로 잘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은 의병부대의 가장 큰 문제는 무기의 열세라고 판단하여, 우선적으로 일본 군경기관을 공격하였고 무기를 빼았았으며 일제의 통신시설 23곳을 파괴하였습니다. 또한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보병총 13정과 탄환 5800발을 획득하였는데 곧바로 일제 헌병대는 2500발의 탄약을 소모하며 선생의 의병부대를 진압하러 전투를 벌였지만 선생의 의병부대에 크게 참패하였습니다.
그 후 선생은 인근에서 활동중인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펼쳤고 의병투쟁 뿐만 아니라 군자금, 군수품 조달등에도 노력하며 일제와 내통하거나 밀정으로 활동한 친일파와 일진회원을 처단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쯤되자 일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생을 체포하려 노력하였는데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지만 그 누구도 선생을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일제가 현상금을 내건지 6개월이 지나고 1915년 7월 5일, 선생은 군자금을 마련하기위해 평안남도의 부호를 찾아가지만 이미 변절해버린 자의 밀고로 일본 헌병이 잠복해있었고 그 자리에서 일본 헌병과 격렬하게 사투를 벌이다 숫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체포되었습니다.
일제는 헌병대장의 직속 수색반을 5개나 꾸려 선생의 활동하던 지역에서 수색을 했으나 성과가없던 찰나에 친일부호의 밀고로 선생을 잡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선생의 8년간의 의병활동은 끝이 납니다.
선생은 체포될 당시 자신을 붙잡은 헌병 지휘관에게 ‘매우 애 썼구나’라고 말할만큼 대담하게 행동을 하였는데 구금되자마자 평양헌병대 본부로 이송되었습니다. 당시 선생의 체포는 엄청난 이슈가 되었고 <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옵니다.
'자동차로 평양헌병대본부에 도착하였는데, 이 유명한 괴물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골목골목 가득하여 시중 분잡이 대단하였더라. 채응언은 엄중히 수갑을 차였는데 보기에 한 40가량쯤 되었고 갈색 헌병복으로 튼튼한 몸을 찼으며, 사납고 겁 없고 담차고 고집 센 성질이 그 얼굴에 나타났더라. 얼굴은 포박할 때에 서로 싸운 까닭으로 난타되어 왼편 눈퉁이가 좀 상하여 거무스럼하게 부어올랐더라. 곧 유치장에 구금되었는데 반듯이 드러누은대로 꼼짝도 아니하며 이미 운수가 다하였다 하며 태연한 모양이더라.'
선생은 재판과정에서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았고 자신있고 당당하게 재판에 임했으며 이때 선생의 재판과정을 참관한 사람은 무려 5백명이 넘었다고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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