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수민선생

2023. 12. 17. 08:55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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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수민선생

김수민 선생은 경기도 장단군 북면 솔랑리 출신으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사격술과 전술 등 무예에 능했던 선생은 결국 의병장이되었습니다.

선생은 화약과 탄약을 직접 제조할 줄 알았기 때문에, 훗날 그가 지휘하는 의병부대의 자체 무장에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이후 김수민 선생을 신임하는 많은 농민들이 그의 휘하에 모여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 구한말 의병의 모습들

김수민 선생은 의병으로 활동하기 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일본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농민군에 가담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던 이 당시의 경험이 의병활동으로 이어졌던 것인데요.

이후 김수민 선생은 고종황제(광무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 회복을 위해 경기도 지역에서 농민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 동학농민군 백산봉기 기록화

1907년, 김수민 선생은 13도 창의군과 함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총대장 이인영의 갑작스러운 귀향과 참여 부대들의 진군 차질로 작전이 무산되자, 1908년 선생은 휘하 의병부대를 이끌고 경기 동북부 지역에서 연합의병을 형성하여 반일항쟁을 전개하였는데요. 김수민 선생은 일제의 계속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의병운동을 펼치며 일본군의 헌병분파소를 파괴하는 등 전과를 올렸습니다.

▲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 모형

1909년 3월, 김수민 선생은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창의도독부사령장겸군량관’ 명의로 전국에 격문을 보내는 한편, 새롭게 의병부대를 재편하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직접 서울에 잠입하여 총기 및 군수품을 구입하였고, 이를 다른 의병장에게 제공하거나 모처에 은닉하여 의병활동에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선생의 서울 잠입이 일제에 의해 포착됩니다. 일본군은 이전에 서울에 잠입했던 김수민 선생을 체포하려다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요.

선생은 서울의 사정이 여의치 않자 1909년 8월, 고양군 하동면으로 피신하였으나 경성필동헌병대에 부하 2명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 정미의병

김수민 선생은 체포된 후 헌병대사령부에서 취조를 받으며 모진 고문 속에서도  “나를 죽일지 살릴지 빨리 결정할 것이고, 나에 대하여 장황하게 질문하여도 답할 것이 없다”고 하며 끝까지 동료 의병을 보호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김수민 의병장은 1909년 11월, 교수형을 받고 약 2년에 걸친 구국 의병전쟁을 마감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김수민 선생에게 내려진 교수형 판결문

김수민 의병장은 1907년 의병전쟁 시기 경기의병의 한 축으로 경기 동북부 의병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의병장 중 한 명이었습니다.

국권 회복을 위해 의병을 일으켜 고군분투했던 김수민 의병장, 우리가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