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곽재기 선생(1893.2.7~1952.1.10)

2024. 1. 10. 10:58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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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곽재기 선생(1893.2.7~1952.1.10)

김원봉, 윤세주와 함께 만주 길림성에서 의열단 조직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폭력-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야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의열단 선언


곽재기 선생은 '대동청년당'에 가입하면서부터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으로 보입니다. 대동청년당은 신채호 선생의 지도로 애국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국권회복운동 단체였는데, 선생은 1909년부터 이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청주 청남학교의 교사로 생활하면서 민족교육에 전념하였는데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세시위운동의 한계를 느낀 선생은 3.1운동의 물결 도중 중국 만주 길림으로 망명하였고 그곳에서 약산 김원봉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길림에서 선생은 김원봉을 만난 직후 서로 의기 투합하여 의열투쟁 단체로 의열단을 조직했습니다.

이들이 조직의 명칭을 의열단이라고 한 것은, “천하의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하기로 함”이라고 하는 강령 제1조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즉, 정의의 ‘의(義)’와 맹렬의 ‘열(烈)’을 따다가 의열단이라고 명명한 것이죠. 정의를 위해 맹렬히 투쟁하자는 의미 그 자체입니다.

선생이 국내에 전달한 것은 폭탄 13개를 만들만한 탄피와 약품, 그리고 그 부속품, 미국에서 만든 권총 두 자루, 탄환 1백발이었습니다. 이를 사용하여 국내에서 대규모 암살, 파괴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 안동을 거쳐 경성으로 왔습니다.  제1차 대규모 암살․파괴 활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분이 바로 선생이기에 의열단의 제1차 암살․파괴 활동은 일명 ‘곽재기 사건’이라고도 불립니다.

경성으로 온 뒤 선생은 인사동에 동숙하며 여러 동지들과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실행을 상의하다가 6월 16일 일경에게 체포 됩니다. 의열단의 제1차 대규모 암살, 파괴 투쟁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당시 재판 과정을 보도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곽재기 선생은 시종일관 흰 두루마기에 금테안경을 쓰고 재판내내 웃으면서 호탕하게 임했다고 합니다. 조국광복에 대한 강한 의지와 의열단원으로서 자긍심과 배포가 느껴지는 대목이었죠.

3․1운동 과정에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민족독립을 선언하기도 하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독립을 청원하기도 하고, 또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독립을 갈구하기도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선생은 무기를 사용하여 피로써 구한 일이 없기 때문으로 보았습니다. 무기를 이용한 혈전(血戰), 즉 의열투쟁을 벌이지 못한 때문으로 인식한 것이죠.

결국 선생은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동지인 이성우와 함께 관련자 가운데 최고형인 징역 8년을 받아 옥고를 치른 후 출옥 직후인 1930년 선생은 다시 국외로 망명하여 만주, 상해, 노령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고, 그러다가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때 선생이 흘린 감격의 눈물은 어느정도 깊이의 눈물이었을지 상상이 되질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