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육사 선생(1904.5.18~1944.1.16)

2024. 1. 16. 09:19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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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육사 선생(1904.5.18~1944.1.16)

30여 편의 시. 참혹한 시대 속 초인적 의지를 잃지 않은 시인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꺼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교목-

이육사 선생은 우리가 잘알면서도 잘모르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학창시절 이육사 시인에 대해 윤동주 시인과 비교하며 저항시인, 항일시인, 대표적 작품으로 <황혼>, <절정>,<광야>,<청포도>,<교목> 등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육사 시인이 의열단이었다는 건 아시나요? 선생에대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어렸을때부터 이육사 선생은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며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실제로 이육사 선생의 할아버지는 학교를 지어 운영하고 계셨던 교장선생님이었기에 선생이 할아버지 학교에서 자연스레 공부하게된것이죠. 선생이 12살이 되던 무렵, 잠시 일본에 건너가 1년 정도 머물렀는데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항일단체 정의부 군정서 의열단에 정식으로 가입했습니다.

선생은 이 무렵 의열단 임무로 북경에 다녀왔는데, 정확히 어떤 업무를 했는지는 기록이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선생의 인생을 통틀어 중국을 매우 자주 다녀왔고 문화활동 뿐만 아니라 직접 항일독립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선생은 1927년 장진홍 선생이 일으킨 대구은행 폭파사건에 피의자로 연루되어 선생의 형과 동생까지 총 3명이 함께 옥살이를 하게됩니다. 이떄 처음으로 받은 죄수번호가 264번, 이육사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온것입니다.

장진홍 선생이 붙잡히고나서야 무죄로 풀려나게 되지만 이때 선생은 상당한 고문을 받은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문은 선생의 민족정신을 오히려 더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1926년 10월 광주학생사건에 참여한 선생은 다시 투옥된적이 있고 출옥한 후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서 루쉰 과 함께 독립운동을 계속이어나갑니다.

1931년 선생은 의열단과 중국 국민당 정부가 합의하여 만든 조선군관학교 간부훈련반에 들어가서 2년간 독립군 간부교육을 전부 이수한뒤 제1기생으로 졸업합니다. 실제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졸업할때 이름도 육사를 사용했습니다.

그 뒤로도 선생은 만주와 중국의 여러 곳을 전전, 정의부(正義府) ‧ 군정부(軍政府) ‧ 의열단(義烈團)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독립투쟁을 벌였고 귀국하여 처음으로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 <황혼>을 발표하며 데뷔합니다.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내 부드러운 손을 힘껏 밀어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게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12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산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황혼 中 -

이육사 선생은 신문사와 잡지사를 옮겨다니며 시, 논문, 시나리오까지 발표했고 청포도, 교목, 절정, 광야를 발표합니다.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제사를 위해 귀국했으나 귀국한지 한달만에 동대문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베이징에 주둔하고있던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서거하셨습니다. 이때 선생이 붙잡힌 이유는 조선군관학교 출신의 의열단원이라는점 때문이었으며 당시 의열단원에의해 일제가 입은 피해가 막심하였기에 관련자들은 모두 색출하여 사형시켰기 떄문입니다. 아이러니한것은 선생의 시를 보면 충분히 항일정신이 강하게 드러나오는데 일제가 이를 해석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중요하게 생각을 못했던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2012년 서거하신 여성독립운동가 이병희 선생의 진언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사실 한가지를 알게됩니다. 당시 일경에 체포된 이병희 선생을 이육사 선생은 자신의 아내이고 독립운동은 자기가 했지 이 여자는 아무런 관련이없다고 감옥에서 빼내어 주었죠. 그리고..이병희 선생 대신 감옥에 들어간 이육사 선생은 한달 뒤 고문으로 인해 옥중 사망하였습니다. 이병희 선생은 이육사 선생의 시신 및 유품을 직접 수거한 인물로 잘 알려져있는데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눈물을 흘리며 시신을 옮겼다고 합니다.

이육사 선생과 윤동주 선생을 우리는 자주 함께 언급합니다. 저항시인 누구 알고있어? 하면 한국사람들은 윤동주, 이육사 라는 이름이 바로 나올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들이니까요. 이육사 선생의 저항시, 그거도 강하게 색채가 드러나는 강렬한 항일정신. 그것은 선생의 행동과 말투 모든것에 다 녹아있었을겁니다. 그런 강력한 저항시를 쓰는 사람이 무장투쟁을 했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의열단원이었다는 점은 저또한 처음 알게된 사실이었기에 매우 감회가 새롭습니다. 실제로 이육사 선생은 감옥에 17번이나 투옥되었으며 1943년 일제가 한글 사용을 금지시켰을때 한시만 쓰는 식으로 붓을 꺽지 않으며 저항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부끄러움, 반성, 기독교적 희생을 다룬다면 이육사 선생은 남성적이고, 목가적이며, 극한에서도 굽히지 않는 의지를 표현했습니다. 이름을 거론하진 않겠지만 일제 강점기에 변절을 했던 문인들이 독립 이후 온갖 문화 권력을 누리며 살아간 것을 생각하면 많은 생각이 듭니다.

....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 -

참고자료
https://youtu.be/FhxheKAfGc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