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20. 22:04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편강렬 선생(1892.2.28~1929.1.16)
열여섯 살에 의병대장을 맡은 전설적인 의병장
"나 죽거든 유골을 만주 땅에 묻어줄 것이요, 나라를 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 -선생의 유언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며 우리는 외교권을 박탈당했는데 이에 전국 각지에서 '왜놈에게 복수를!' 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선생은 우선 1907년 선생의 고향 경사도 지역에서 일어난 이강년 의병장의 의병부대에서 소집장 및 선봉장을 참전하여 경상도 충청도 일대에서 일군과 싸워 큰 공적을 세웠습니다.
1년 후, 전국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자 13개 도의 의병부대를 연합 결성하여 서울 진공작전을 결심 실행하였으나 전투중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내려오게되었습니다. 이 때 선생의 나이가 16살입니다. 그 후 선생은 일경의 주요 감시대상으로서 살게 되었고 최대한 활동을 숨기며 기회를 엿보고 살았습니다.
1910년. 우리나라는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고 선생은 이를 참지 못하고 다시금 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선생의 오랜 침묵을 깬 첫 활동은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 황해도 지부에서 활동을 벌였으나 일제가 총독 암살 모의사건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서대문 감옥에 수감됩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끔찍한 고문고 악폐습을 당했지만 선생의 독립정신은 더욱 견고해져 출옥 후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소수정예의 결사대를 조직 치열한 항일전을 벌였습니다.
박은식 선생이 남긴 독립운동의 치열한 역사를 기록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보면 "일제에 죽어간 우리 의병은 15만명 정도 이며 의병이란 바로 우리 민족국가의 정수이다. 나라는 멸망시킬 수 있어도 의병과 의병정신은 멸할 수 없다.” 라고 말합니다.
선생의 이런 애국활동은 의병정신에서 기인한 것이라 봐도 될 것입니다. 1919년 3월1일.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 3.1만세시위 운동이 일어납니다. 편강렬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했고 3월 15일부터 만세시위에 가담했습니다. 만세시위 이후 선생은 친동생 편덕렬 선생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파견보냈으며 황해도에서 동지들과 군사주비단을 조직하여 독립군의 국내 진입시 원조를 목표로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이 밀정에 의해 일경에 발각되며 비상경계망이 떨어졌고 검거작전에 들어가 선생은 붙잡혀 다시 1년 2개월간 수감생활을 하게됩니다. 다시한번 끔찍한 고문을 겪은 선생은 출옥후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부인과 가족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사라졌고, 운영하던 점포는 채권자에게 전부 탈취당했으며 무일푼 빈털털이가 되버렸습니다. 선생은 이제 남은것은 정신밖에없다며 중국 만주로 이동합니다.
만주에서 선생은 양기탁 선생, 남정 선생등과 함께 의성단을 조직하고 의성단 단장이 됩니다. 의성단은 만주를 무대로 열,성,담력으로 중국인들의 한인에 대한 의식을 바꾸어놓고 교민들에게 희망과 긍지를 심어주는 일을 해냅니다. 당시 의성단의 단원의 수가 250명 정도가 되었고 전부 무장훈련되어 국내에 진입할 준비까지 했던 것을 보면 그 규모나 정신을 가늠해볼수 있습니다.
의성단의 이름으로 선생은 1924년 단원들과 함꼐 장춘성 내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였습니다.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한 일본 영사관원들, 그리고 일경 후발대와의 교전. 무려 7시간이나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교전 끝에 일본 군인, 경찰 60명을 살상하는 큰 승리를 얻어냅니다. 전투가 끝나고 몇시간 지나지 않아 선생은 곧바로 쉬지않고 시내에 일본만철병원을 습격하여 다수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고 의성단 본부로 돌아왔는데 이 사건은 엄청난 이슈가되어 일본 총독부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일본 총독부는 제 1급 사건으로 의성단 진압작전을 시작하였고 만주에 있던 모든 일본 경찰력과 밀정을 총동원하였고 총독부 사무관 홍모를 특파하여 선생을 체포하려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편강렬 선생은 오히려 일제를 조롱했는데 장춘 시내에 '아사홍생 아생홍사' 라는 '홍가와 나와 죽기 아니면 살기다' 라는 벽보를 붙여 선생의 패기를 보여주었습니다.
1920년 초가 되자 선생은 서로 다른 수많은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도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1924년 8월 선생은 부하 10여 명을 거느리고 군자금을 모집하러 하얼빈으로 이동했는데 이곳에서 독립운동 단체 대표들과 만나 통일회를 조직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중간에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었고 미리 잠복해있던 일경에 포위를 당하게됩니다.
거리를 가득 매우는 총소리. 결국 선생은 일경에서 체포되었고 1924년 8월 22일 신의주로 끌려가 징역 7년형을 선고받습니다. 수감생활을 시작한지 2년이 지날 무렵 선생은 감옥에서의 고문에 너무 시달려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었고 결국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골수에 맺힌 병이 사라지지않아 사망하였습니다.
선생이 죽기전 가족들은 시설이 좋은 일본병원에가서 치료를 받자 하였으나 선생은 “죽어도 왜놈에게는 치료를 받지 않겠다 내가 죽거든 유골을 만주 땅에 묻어줄 것이요, 나라를 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 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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