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22. 11:30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김상옥 선생(1890.1.5~1923.1.22)
400 : 1 전투, 의열단 행동대장! 조선 최고의 총잡이, '각시탈' 이였던 사나이
"동지들,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김상옥 의사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가난하고 우울했던 유년기를 보냈지만 14세부터 낮에는 철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하며 개신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1912년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점'을 운영하였는데 김 의사의 초기 사회적 활동은 상당히 시대를 앞서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상옥 의사는 철물점을 통해 사업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해 독립자금을 조달했으며 당시 종업원들에게 노조를 통해 자신들의 권익을 찾을 수 있게 도왔습니다. 살아계실 적 별명은 '동대문 홍길동'이었는데 철물점을 운영하면서도 무장투쟁을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여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기마경찰을 맨손으로 때려눕혀 검을 빼았을 만큼 무술에도 능했으며 당시 총솜씨는 말 그대로 명사수라 불릴만큼 비범했다고 합니다.
또한 단발령 이후 잘려진 머리를 감추고 다니기 위해 당시 모자가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 모자들이 대부분 수입산이여서 말총을 이용한 모자를 만들어내 저렴한 가격에 배포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김 의사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3•1 운동 직후부터 입니다. 그 해 4월 동대문교회 안의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혁신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그해 12월에는 '암살단'을 조직해 일본 고관 및 민족반역자에 대한 응징 및 숙청을 시도하였습니다. 특히, 1920년 4월에는 한훈•유장렬 선생 등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민족반역자들을 총살하였습니다.
1920년 8월 24일에 미국의원단이 동양 각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에 접하자, 그 해 5월부터 김동순•윤익중•신화수•서대순 등의 동지를 지휘해 환영하기 위해 나오는 총독 사이토 마코토 및 일본 고관을 암살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거사계획은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었고, 동지들이 붙잡혀 단독으로 거사를 추진했으나 여의치 않자, 10월 말 상해로 망명하였습니다.
그 뒤 11월 임시정부요인 김구•이시영•조소앙•신익희 선생등과 독립운동 거사계획에 참여하는 동시에 의열단에 입단하였습니다. 1922년 11월 중순 상해에서 임시정부요인 이시영•이동휘•조소앙•김원봉 선생등과 의논해 일본총독 및 주요 관공서에 대한 암살•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습니다.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투탄으로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고 행인 남자 6명과 여자 1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큰 소동이 났습니다. 투탄 당시만 하더라도 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일본 경찰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는데 이로부터 5일이 지난 1월 17일에 일본 경찰은 투탄의 장본인을 알아내고 은신처를 추적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월 17일 새벽 3시 은신처인 매부 고봉근의 집이 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 와사부로에게 탐지되었고, 종로경찰서 우메다•이마세 두 경부 지휘 아래 20여 명의 무장경찰에게 은신처가 포위되었는데 사실 이것은 고봉근의 행랑방에 들어와 있는 여자가 종로경찰서에 있는 친정오빠에게 밀고하여 탄로가 난 것이었습니다.
은신처가 탄로나자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먼저 종로경찰서 유도사범이며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하였고. 이마세•우메다 경부 등 수 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추격하는 일본 경찰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가옥의 옥상을 뛰어 다니며 도주했습니다. 눈 덮인 남산을 거쳐 금호동에 있는 안장사에 이르러 스님에게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하고 산을 내려왔으며 18일은 이모집에서 유숙하고 19일 새벽 삼엄한 일본 경찰의 경계망을 피해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은신하며 여기서 동상도 치료하면서 앞으로의 거사계획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23년 1월 22일 새벽 최후 은신처마저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고 말았고 상해로부터의 서신이 효제동으로 온 것을 전해준 전우진이 일본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고문당한 끝에 은신처가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날 5시 반경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가 총지휘관이 되고 보안과장 후지모토가 부지휘관이 되어 시내 4대 경찰서에 총비상령이 내려졌습니다. 기마대와 무장경관 400명이 은신처를 중심으로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였습니다. 일경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왔으며 김상옥은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방안 벽장 안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습니다. 구리다 경부가 방으로 들어와 벽장 안을 열어 젖히다 가장 먼저 사살당했으며, 벽장 담을 뚫고 순식간에 옆집 74번지를 지나 76번지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겁에 질린 76번지 집주인이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자 다시 담을 넘어 72번지로 갔으며 이후 담벼락을 지탱해 권총 2자루로 3시간 반 동안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탄환마저 다하여, 마지막 남은 탄환 한발을 머리에 대고 벽에 기댄 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자결, 순국하였습니다. 이후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했는데, 총 11발의 총상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자결한 총알 1발을 제외하면 10발의 총알을 맞은 것이 됩니다.
일본 철혈통치의 핵심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천여명의 일본 군경에 혼자 맞서 총격전을 벌일 정도의 인물임에도 안타깝게도 대중들에게는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중매체에서도 별로 다뤄지지 않았었습니다. 처음 독립운동가 앱을 제작하던 때 이런인물의 삶 자체가 영화인데 왜 이런분을 다루는 영화가 없을까를 주변에 말하곤 했는데 영화 <암살>과 <밀정>이 나오면서 김상옥 의사가 대중에게 알려지자 누구보다 기뻤습니다.
보통 여타 독립투사들의 경우 의거를 기리는 행사를 할때 '의거 기념식'이라는 표현을 쓰고 사망자들의 경우 순국 '추모식'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김상옥 의사의 경우 사망일이 1월 22일임에도 '순국 추모식'이라는 말 대신 '시가전 승리 기념식' 또는 '독립활동 기념식'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비록 일본 경찰과의 서울시내 총격전을 벌이시고 마지막 한발로 순국했으나 '시가전'이라고 칭송될만큼 혁혁한 공로를 세웠고 당시 일제에 준 충격이 엄청났기 때문이죠. 역사가에 따라서는 그의 활약으로 일본에 억눌려 있던 우리 민족이 저항을 위한 의지를 되찾았고 이후 항일 무장투쟁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실제 생존 애국지사 중 한명은 어릴적 신문에 난 김상옥 의사의 투쟁을 보고 '일본놈들은 수천명인데 왜 저 분 혼자 싸우시는가?'라며 독립운동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는데 순국하시는 당시에도 일본 경찰이 이 분을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 잘 나타나있습니다. 김상옥 의사는 마지막 총알로 자결하신 후에도 양 손에 권총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일본 경찰은 김 의사가 살아 있을까봐 다가가지 못했고 결국 김 의사의 어머니를 보내 생사를 확인하게 했다 합니다.
김상옥 의사는 국가보훈처에서 1992년부터 선정/발표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최초로 선정된 인물이며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 김상옥 의사의 동상이 있으며, 종로4가 북쪽 효제초교 앞길은 그의 이름을 딴 "김상옥로"로 명명되었습니다.
참고자료
1.https://youtu.be/OZ4Vh4WFQVU
2.https://youtu.be/SfAlka-FsEY
3.영화 밀정,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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