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좌진 선생(1889.11.24~1930.1.24)

2024. 1. 24. 09:52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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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좌진 선생(1889.11.24~1930.1.24)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독립군의 영원한 장군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칼끝에 찬 서리가 고국생각을 돋구누나/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단장의 아픈 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장군의 시 단장지통
(斷腸之痛)-


김좌진 장군은 유년시절 글공부보다는 활쏘기, 말타기, 병정놀이를 즐겨 했는데 동네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할 때는 항상 대장 노릇을 하였다합니다. 특히 병정놀이 때에는 대장기에 “억강부약(抑强扶弱)”이라고 썼다고 한다. 즉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돕는다’는 뜻을 유년시절부터 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군은 삼국지, 수호지를 통달할 정도로 읽었으며 군사학에 관련된 책을 탐독하였고 무술연마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장군은 나라를 구하는 운동으로 먼저 자신의 집에서 거느리고 있던 모든 노비들을 해방시켰습니다. 집안에는 30여 명의 노비가 있었다고 하는데 집안의 모든 노비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인 후에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노비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였습니다. 이때 장군의 나이가 17세였습니다. 장군은 노비해방을 단행한 후 무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군사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식으로 군사교육을 받기 위해서였는데, 장군이 무관학교에 재학하던 시절은 대한제국이 일제의 준 식민지 상황이 되면서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던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는 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장군은 계몽운동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것입니다다. 장군은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주로 군자금 모집과 대한광복회활동이었습니다. 1911년 친척뻘 되는 사람에게 군자금을 요청하러 갔다가 이미 변절해버린 친척뻘 되는 사람의 밀고로 미리 잠복해있던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 6개월간 수감생활을 합니다. 장군은 1913년 9월 출감하였으며 홍성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다시 홍성헌병대에서 10개월간 수감됩니다.

홍성헌병대에서 풀려난 후에는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활동범위가 넓었던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활동하였습니다. 대한광복회는 만주에 부사령을 상주시켜 국내조직과의 연계를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책임을 맡겼는데 장군이 그 책임을 맡아 파견되었습니다. 그 후 1920년 부터 간부양성소인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여 독립군간부를 키워내었고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으로 훌륭한 교관들과 각종교재를 도움받았습니다. 당시 총사령관은 김좌진 장군이었고 교관들은 이범석, 김규식 선생이 훈련을 담당하였습니다.

1920년 6월 7일. 독립군을 추격해 들어온 일본군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 선생이 지휘하는 독립군연합부대가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하는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에 일본군은 ‘훈춘사건’을 일으켜 독립군을 토벌할 목적으로 간도에 출병하였습니다. 독립군부대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10월 21일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 천보산전투, 고동하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특히 장군이 이끄는 대한군정서군은 청산리대첩의 대표적인 전투인 백운평, 천수평, 어랑촌전투 등에서 큰 전승을 거두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주력부대였습니다.

청산리대첩 후 대한군정서의 서일 총재는 임시정부에 “김좌진 부하 600명과 홍범도의 부하 300여 명이 일본군 1300여 명을 격살”하였다고 보고할 정도로 일본군의 피해가 막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청산리 전투는 한국독립군이 벌인 전투 중 가장 대표적인 전투였으며 또한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저지시켰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처음으로 피부로 심어준 전투였습니다.

이처럼 장군이 이끄는 대한군정서군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사관연성소 졸업생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훈련이 잘 된 부대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총기 약 800정, 기관총 4정, 수류탄 약 2,000개, 박격포 2문을 갖추고 있어 무장이 구비된 정예부대였으며 장군은 청산리 전투 이후 북만지역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청산리전투 후 독립군부대들은 큰 시련을 겪게 되었는데, 그것은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일본군이 독립군 부대 및 한인마을을 전멸시키려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피해 러시아 국경지역으로 이동했던 독립군부대들은 자유시참변을 당하고 다시 북만주지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 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암살되엇는데 당시 공산주의자들을 배척하고 의열투쟁가들인 아나키스들을 받아들인데 대한 보복이었다는 설명이 주를 이룹니다. 김좌진 장군은 김두한의 친부이고,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19대) 김을동의 친조부입니다. 또한, 2016년 광복71주년 8.15 특집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증손자 김도현은 육군 병장으로 전역한 뒤 공군 부사관이 되었다가 또 다시 해군 장교로 임관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로, 증조부의 유지를 잇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