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장녕 선생(1881.5.20~1932.1.24)

2024. 1. 24. 09:56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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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장녕 선생(1881.5.20~1932.1.24)

만주에서 청년들을 군사훈련시키며 독립군을 키운 대한독립군단 참모총장


이장녕 선생은 이동녕 선생과 같은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입니다. 실제로 이동녕 선생은 이장녕 선생의 집안사람인데, 이장녕 선생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찾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이장녕 선생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복무하다 군대 장교신분 상태에서 나라가 일제에 완전히 빼앗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후 일제에 의해 강제군대해산 후 가족전부를 이끌고 1907년 11월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3개월이나 걸려 도착한 중국. 이곳에서 선생은 신민회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목표를 실행합니다.  실제로 이회영 선생 가문보다 3년 먼저 이주하여 먼저 온 사람으로서 후에 온 가문과 동포들의 초기 정착을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이회영 선생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뒤 교관, 교장까지 역임하였고 독립군 배출에 선생의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더욱이 백산학교 교사도 역임하였는데 이러한 활동은 서간도 지역에서 선생의 활동범위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1919년 선생은 서일, 김좌진, 조성환 선생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참모장 및 참모관으로 활동하였으며 북로군정서에서 단기속성 사관학교를 부속으로 세웠을때 이범석 선생등과 함께 이곳의 교관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교관으로서 선생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으며 실제 중요한 결과를 도출했는데 교관으로 있었던 선생이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두 군 단체의 긴밀한 관계를 향상시켰고 이러한 관계향상은 전투의 성과로 드러났으며 결국 청산리 대첩으로까지 이어집니다. 훌륭한 지휘관만으로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어렵습니다. 홍범도, 김좌진 장군의 승리의 주역이라면 숨겨진 주역으로 선생이 있었던 것이죠.

1920년 말에는 청산리대첩 이후 독립군들이 밀산(密山)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3,500여명의 대병력을 거느린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되자 참모장에 이동녕 선생, 총재 서 일, 부총재 홍범도 장군등과 함께 계속해서 대일 무력항쟁을 이어갔습니다. 그 후 선생은 신숙, 홍진, 지청천 장군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고 한중 연합군을 조직하여 무장항일투쟁을 지속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