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류인석 선생(1842.1.27~1915.1.29)

2024. 1. 29. 10:28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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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류인석 선생(1842.1.27~1915.1.29)

을미의병 최고 지도자, 호좌 의병진을 이끌다.

진실로 위급존망의 때입니다. 각자 거적자리를 깔고 방패를 베개 삼아 물불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위태한 곳이라도 뛰어들어 기어코 망해가는 나라와 천하의 도의(道義)를 다시 일으켜 하늘의 태양이 다시 밝도록 하여야 합니다.    -선생의 의병 격문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 중에서-

우리는 흔히들 류인석 선생을 의병장으로만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를 봤을 때 선생의 위대한 점은 좀더 거시적으로 바라봐야합니다. 류인석 선생은 화서 이항로 선생의 수제자로서 당대 최고의 학문 및 가문들에서 정통 교육을 받은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1876년,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을 비롯한 같은학파 인물들은 상소를 올려 조약 체결을 저지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는 묵살되어 버렸는데 이 상소의 내용을 살펴보면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역사는 항상 후대에 의해 해석되기에 편하게 말하는 것일수도 있지만 이때 이러한 상소들이 받아들여졌다면.. 어쩌면..하는 생각이 아련히 스쳐 지나갑니다.

당숙인 유중교 선생이 춘천에서 제자를 양성하던 중 돌아가시자 류인석 선생은 당숙이 닦아 놓은 기반을 흡수하기 위해 이사를 갑니다. 선생은 바로 그 곳, 제천을 거점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하게 됩니다. 선생의 의병활동을 논하기 전에, 잠시 당시의 시대상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무렵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김홍집을 이용하여 조선의 전통과 기풍을 흔들어놓는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고 갑오개혁이 일어나 입는 옷들이 서양식으로 바뀌었으며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하는 야만적 범죄를 저질릅니다. 그 후 음력에서 양력으로 역법을 바꾸었고 (이때부터 우리는 생일을 양력으로 읽습니다. 원래 우리나라는 날짜를 다 음력으로 계산했습니다. 어르신들을 보면 음력으로 생일이나 기념일을 챙기시는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성인남자의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총체적인 격변이 바로 지금 의병을 일으켜야만 한다는 결심으로 이어졌고 류인석 선생은 수백 명의 문인들을 모아 의병부대를 만들었습니다. 글을 쓰던 선비들. 책을 읽고 이치를 깨달은 자들. 지성인이라 불리는 자들이 무기를 들게 된 것입니다.

의병대장에 취임후 선생은 충주성을 처음으로 공격했습니다. 대장을 포함하여 참모들 한명한명 지성인들이었기에 이들의 공격은 달랐습니다.3500명의 병력으로 기습에 성공한 첫 공격. 실제 총을 가진 자는 4백여 명에 불과했고 신식 병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비해 전력면에서 절대적 열세였으나 죽음을 각오한 의병들이 동시에 동서남북 사방향에서 함성을 지르며 다가오자, 그 기세에 눌린 일본군은 전투를 아예 포기하고 도망치기에 바빳습니다. 충주성을 빼앗자마자 선생은 친일파들과 탐관오리 및 단발령을 강요한 관리들을 숙청하였습니다.

그 후 선생은 일본군과 여러번의 소규모 전투를 벌였고 서간도로 망명하게 되었는데, 의병부대를 주둔시키는 문제에 대해 그곳의 관찰사나 군수들이 도움을 주지않아 난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와중에도 친일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재격백관문>을 발표한 뒤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회인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그곳의 지방관리가 의병들이 무기를 소지한 채 입국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하여 무장해제를 요구하였고 선생은 눈물을 머금고 생사를 함께한 동지 219명의 의병을 해산시켰고 역사에 남는 을미의병 항쟁은 사실상 종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 후, 고종황제의 명으로 잠시 귀국 후 곧바로 만주로 돌아온 선생은 문인 동지들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원한을 품고 고통을 참으며 때가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만주지역이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릴 무렵, 선생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가 없었고 이때부터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며 지역 주민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주력하게 됩니다. 그 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 사건이 일어났고 정미7조약이 터지자 드디어 연해주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였는데 이 후 선생은 다시는 고국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배안에서 선생이 지은 시가 전해집니다.

병든 한 몸 작기도 한데 휘달리는 범선 만리도 가볍구나 국명(國命)은 지금 어떠한가 천심(天心)이 이 길을 재촉하도다 풍운은 수시로 변하고 일월만이 홀로 밝도다 주위의 한가로운 소리에 나의 심정만 아득해진다.

연해주에 도착한 선생은 이상설, 이범윤 선생등과 함께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을 하나의 조직체로 통합하고자 노력하였고 13도의군이 만들어지자 총재가 되었습니다. 1910년 나라를 빼앗겼다는 비보를 듣고 적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는 뜻인 '성명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당연히 회장은 선생이 추대되었고 조국 광복의 그날까지 일제와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선생은 즉시 한일합병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중국, 러시아 인근서 활동하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포함 총 8624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의 탄원서명을 받아내었고 각 나라의 정부 및 신문사에 발송하였습니다. 그 후 선생은 1915년 1월 29일, 지병으로 인해 파란 만장한 일생을 마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