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한징 선생(1886.2.20~1944.2.22)

2024. 2. 22. 09:00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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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한징 선생(1886.2.20~1944.2.22)

언어독립운동가, 순 조선어 대사전을 편찬해내다


“말과 글은 민족정신의 가장 중요한 소산인 동시에 민족정신이 거기에 깃들이는 둥주리다. 민족 문화의 창조 계승 발전은 그 말과 글의 의지에 있다.” - 한징

한징 선생은 이윤재 선생과 함께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중 순국한 한글학자입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 분위기속에서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는것이 우리가 할수 있는 독립운동이며 애국활동이라고 믿던 지성인들이었고 그들의 신념이 오늘의 한글사용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보면 이 분들을 다루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극로 선생은 1929년 1월 귀국 후 민족을 위한 사전을 편찬하자는 이윤재 선생의 계획을 적극 수용하며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우리 민족과 민족성을 영구히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국어사전을 편찬하는 것이다라는 신념으로 만들었죠. 한징 선생은 사전편참 전담집필요원으로 이극로 이윤재 선생과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이극로 선생은 순수 조선어를 맡았고, 한징선생은 한문계통의 어휘를 총 정리하였다합니다.

역사의 기록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해방 뒤 한글날을 맞이하여 조선어학회의 동지 이중화 선생은 한징선생에 대해 “한징 씨는 그 집안이 4백여 년 서울에 근거를 가진 집이니만큼 정확한 발음을 압니다. 발음과 한자말 주석에 공적이 큽니다. 이 사람 역시 빈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의 부모에 대한 효성은 유명한 이야기로 참으로 모범적인 인물이었지요.”(「존귀한 희생자」, 『자유신문』, 1945, 10, 9)라고 회고하였습니다.

당시 함께 사전편찬원으로 있었던 권승욱 선생은 한징 선생이 “언제나 쉴 새 없이 원고 쓰시기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일제말기 조선어학회의 서기로 근무하였던 이석린은 당시 조선어학회가 주는 월급이 박봉이어서 한징선생도 조선어학회에서 퇴근한 뒤 인쇄소에 가서 교정 일을 보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 한글날 행사가 금지되자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사무실에서 몰래 한글날 행사를 거행한뒤, 신문지를 펴놓고 북어를 안주삼아 먹으며 막걸리를 한 잔씩 마셨는데 이때마다 한징은 “원고를 속히 마치도록 합시다. 그래서 큰 사전을 하루 빨리 활자화하여 얼른 세상에 퍼뜨려야지, 까딱했다가는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우려가 있어. 왜놈들 하는 짓이 날로 수상해”라고 말하셨다 합니다.

선생은 이토록 순 우리말 사전, 조선어사전을 빨리 세상에 내놓고 싶어했으며 우리말을 보존시키고 우리 민족을 영원히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고 선생의 이런 신념과 태도는 같이 사전을 편찬한 이윤재 선생과 이극로 선생의 태도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말과 글은 민족과 운명을 같이한다. 일본이 조선의 글과 말을 없애 동화정책을 쓰고 있으니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글과 우리말을 아끼고 다듬어 길이 후세에 전해야 한다. 말과 글이 없어져 민족이 없어진 가까운 예로 만주족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글을 써 두고 조선어사전을 편찬해 두면,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후에 이것을 근거하여 제 글과 말을 찾아 되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말과 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 되고 또 민족 운동이 되는 것이다. -이윤재 선생이 젊은 청년들에게 한 말-


어떻게 해서든지 조선어사전을 완성하여 내놓아 이것이 어느 구석에 박혔다가 후일 때가 돌아오는 날 민족의 말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게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말과 조선의 혼은 영원히 말살되고 마는 운명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니 끝까지 고생을 참고 일할 수밖에 없다. -이극로 선생이 동지들에게 한 말 -


일제는 당시 민족말살정책을 펼치고 있었고 우리 말과 글을 사용하는걸 완전히 금지시켰습니다.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사전의 완성을 통해 우리말과 조선의 혼을 영원히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사전 편찬이 완성되는 그날, 언젠가 시간이 지나 때가 조국이 광복되는 그날 우리 민족어를 되살릴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1942년 10월 일제는 일명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전편찬 위원 전원을 긴급체포하고 사전원고 및 서적을 전부 압수하였습니다.

민족의 언어를 영원히 유지하는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민족정신의 유지, 즉 투쟁의 씨앗이 될 수 있었기에 언어독립운동에 해당합니다. 국어학자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나라를 지키려고 한 행동이었던 것이죠.

한징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1942년 10월 1일에 체포되었고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구금되어 매일마다 난타를 당하고 물고문을 당하였는데 왜 사전을 편찬했냐는 일본 순사의 질문에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말을 쓰고, 조선말을 사랑하는 데에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항의하다가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2월 22일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 순국하셨습니다.

고문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조선어학회장 이극로 선생은 광복후 다음과같이 말했습니다. “한징선생은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에 종시 일관 관계하여 사전편찬에는 누구보다도 그의 공로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이극로, 「이미 세상을 떠난 조선어학자들」, 『경향신문』, 1946. 1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