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1892.6.18~ 1944.3.13)

2024. 3. 13. 11:59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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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1892.6.18~ 1944.3.13)

재미 항일 여성운동 단체 '근화회' 조직

"옛말에 이르기를 나라를 내 집 같이 사랑하라 하였거니와 가족으로서 제 집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집이 완전할 수 없고, 국민으로서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보존하기 어려운 것은 아무리 우부우부(愚夫愚婦)라 할지라도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일분자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 국민성 있는 부인은 용기를 분발하여 그 이상에 상통함으로써 단합을 견고히 하고 일제히 찬동하여 줄 것을 희망하는 바이다"


선생의 집안은 만석꾼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하였을 뿐 아니라 선생의 아버지 김윤방은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한 뒤 송천리에서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 계몽운동에 종사하던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김마리아 선생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10대시절 모두 사망하여 숙부들의 슬하에서 자라게 되는 풍파를 겪게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결의형제를 맺고 세브란스의전을 나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김필순(金弼淳)은 선생의 셋째 삼촌이고, 김규식 선생의 부인이자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김순애는 선생의 셋째 고모였습니다. 자연스레 민족정신을 갖고있던 애국지사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선생역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가 되어 갔습니다.

이 시기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1918년 1월 8일 전후 처리 지침으로 미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그 해 11월 11일 종전이 이루어지면서 이듬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당시 동경 유학생들은 이를 한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고자 독립선언을 준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계획이었고, 여기에 선생과 황애덕(黃愛德)을 비롯한 여자 유학생들도 참여하여 활동하였습니다. 선생과 황애덕 등 여자 유학생들은 성금을 거둬 2•8독립선언 준비 자금에 보탰고, 2•8독립선언 당일에는 동경 간다(神田)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도 참석하였습니다.

나아가 황애덕과 같이 등단하여 일제의 한국 식민지 정책을 신랄하게 성토 규탄하고, 최후의 순간까지도 일제와 투쟁할 것을 눈물로 호소하였다고 합니다.

선생은 이같은 독립운동이 동경에서만 그쳐서는 안되고, 국내에 전파하여 거족적이며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확대하여야 조국 광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전 여성들이 참여하지 않고는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때 황해도 지역을 돌아다니며 지방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하고 있었는데 3.1운동 소식을 들은 선생은 지속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모색하고자 했습니다. 그 후 만세시위와 관련하여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고 경무총감부에서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은뒤 보안법 위반 혐위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됩니다. 6개월의 시간동안 선생은 갖은 고문을 받았지만 이를 이겨내고 8월 4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고문으로 상한 신체는 평생동안 후유증을 남기게 됩니다.

출감 후 선생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독립의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더욱 강인해진 독립의지와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며 지속적인 독립운동 방략을 강구하였는데 선생과 주요 애국지사들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 를 조직, 확대하였고 서울, 대구를 비롯하여 부산, 전주, 진주, 평양, 원산 등 남,북한 15개 지방에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2,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권회복을 위한 구체적 방략으로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 수합 활동을 벌여 6,000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실적을 올렸습니다. 그러던 중 조직원의 배신으로 1919년 11월 28일 선생을 비롯한 임원진 등 52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북도 경찰국으로 압송되었습니다.

대구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받았으나 수감기간도중 선생은 일제의 고문에 몸이 너무 상해서 병보석으로 1920년 5월 22일 출감하게 되었고,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됩니다.

이광수의 〈누이야〉라는 시는 김마리아 선생 귀국을 기념하는 작품이며, 도산 안창호 선생은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10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고문을 하던 당시 일본 검사가 탄복할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1938년을 전후하여 천주교, 장로교, 감리교 등 한국 기독교 주요 교파들의 신사참배 강요에 협력하여 기독교인들이 대거 변절하던 시기에도 김마리아 선생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끝까지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강조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고문 후유증이 재발함에 따라 1943년 집에서 갑자기 졸도 하였으며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조국 광복을 눈앞에 둔 1944년 3월 13일 병원에서 순국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