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장병준(張柄俊)1893.06.10 ~ 1972.03.15

2024. 3. 15. 11:27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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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장병준(張柄俊)1893.06.10 ~ 1972.03.15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의원, 신간회 중앙대표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광복후 독재에 저항했으며,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


1893년 태어났다. 아버지 장진섭에 의해 어릴 때부터 대처에 보내져 교육받았다. 그는 서울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니혼대 법과를 다녔지만, 유학 3년차인 1917년 돌연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그 이후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1919년 3.1 운동 이후 여러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것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1919년 4월 23일 조직된 대한국민대회에 합류해 이후 만들어진 한성정부에 참여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들어가 전라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된다. 하지만 임시정부 위치를 상하이에 둘 것인지 러시아로 옮길 것인지에 대해 갈등을 빚어 위원 직임에서 해임됐다. 물론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공식 문서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장현숙'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며 북간도, 연해주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모집, 선전물 우송과 조직원 포섭 등의 일을 했다.





1920년 3.1 운동 1주년 기념경고문 배포사건으로 3년 동안 수감된다. 그 후 지역에서 일어나는 독립운동을 조직하고 통합하는데 힘썼다. 신간회 창립을 주도했고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이것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민중대회운동을 서울에서 열어서 체포됐다.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창씨개명, 황민화 정책을 모두 거부하고 조카, 동생들과 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했다.해방 이후 친척들과 자신들의 재산을 나누어 주고 학교를 세우는 등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그는 정치 관련해서 여러 직책을 받았지만 나이가 많아 동생들이 적극적인 활동에 나섰다. 이승만이 제4대 정 • 부통령 선거에서 부정를 저질러 장병준이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인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