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12. 23:50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이상룡 선생(1858.11.24~1932.5.12)
이상룡 선생은 독립운동사에 손꼽히는 대표 명문가집안 출신 독립운동가 중 한 분입니다.
정통 유학자로서 어려서부터 엘리트 수업을 받은 선생은 일제가 우리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선포했을때 외삼촌인 권세연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전하며 독립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1905년이 됩니다. 우리나라는 을사5적으로인해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망국의 길을 걷게됩니다. 이때 선생은 자신의 집안 전제산 1만5천금을 투자하여 박경종 선생과 함께 가야산에 군사기지를 설립하였고 군사훈련을 실시합니다. 하지만 무기의 열세 및 군 기지 지속성등에서 한계를 자각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합니다.
선생의 주변엔 유인식, 김동삼 등의 훌륭한 애국지사들이 있었고 선생은 이들과 함께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우는것이 중요하다 판단하여 협동학교를 세웠습니다. 협동학교는 매우 근대적인 교육을 가르쳤는데 오늘날 우리가 대학교에서 배우는 칸트, 홉스, 루소 등의 철학을 비판적 추론을 통해 우리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새로운 동양서양 철학의 합의점을 돌출해냈습니다.
선생은 전통 유학파로서 이러한 근대적 서양 철학을 받아들이고 가르쳤다는 것은 당시에 매우 어려운 일이였을겁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나라를 구하려는 마음이있었기에 가능한 변화라고 해석합니다. 그 후 선생은 당시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에서도 활동하며 해외 독립군 군사기지 개척을 위해 결심을 하고 만주로 이동합니다. 이떄 선생의 나이는 50이 넘었으며 만주로 도착한 선생은 이회영 선생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고 처음으로 한인들을 규합해 벼농사를 시작해 군량미를 보급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곳은 우리의 옛 땅, 부여, 고구려, 발해 의 옛 터전이었고 1000년이 지나 다시 그곳에서 조국을 되찾으려는 꿈을 키웠다는 것입니다.
1920년대가 되면서 해외에 주둔하고있는 독립군 기지 및 독립운동단체의 종류가 매우 많아졌습니다. 처음에는 애국의 의지로만 보였지만 나중에는 너무 의견들이 나뉘어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는 상황까지 처했습니다. 당시 임시정부가 개조파, 창조파 등으로 나뉘자 선생은 각 대표들을 소집하여 독립운동계의 분열을 막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습니다.
또한 중국 동삼성 지역에서 활약하던 김좌진, 김동삼, 오동진 선생등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그들의 군사 통합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선생의 마지막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로 나뉘는 3개의 정부를 하나로 통합하는 삼부통합운동이었고 간신히 2개로 합치는데 성공한 선생은 그 직후 서거하셨는데 마지막 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
50년에 걸친 나라를 되찾기 위한 선생의 노력. 나이 50에 떠난 해외 망명. 의병, 교육, 학교설립, 독립군 간부양성, 당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애국을 실천한 잊혀진 영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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