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9. 09:49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이승훈 선생(1864.3.25~1930.5.9)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계열, 신민회 인사들이 한꺼번에 체포되었다. 용산을 출발하던 경의선 열차에 탑승할 때 변장을 하고 여행하였으나, 동료 김구, 양기탁, 윤치호, 옥관빈, 이동휘 등 동료 신민회 회원들이 일본 경찰에 줄줄이 체포되어 강제로 하차당하는 것을 보고, 신문을 보던 그는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뒤 창밖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창밖을 보며 눈물흘리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총독부의 일본 경찰은 변복하고 신문을 읽던 장년 남성이 이승훈임을 알아보고 바로 체포했다. 105인 사건이 적발될 당시 그는 이미 이전의 안악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나, 서울에서 검거되자 법원으로 압송, 이 사건의 주모자로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불교, 천도교와 더불어 기독교인으로서 조선의 종교계를 대표하는 민족대표 33인에 참가하였으며,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언도 받았다. 그래서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도 교원들이 모두 검거되고, 민족교육의 온상인 오산학교와 교회가 불타는 탄압을 면하지 못했으나, 조만식, 유승모, 박우병, 장지영, 백봉제, 현상윤 등의 노력으로 1919년 7월 학교가 재건되었다.
1922년 가출옥한 이승훈은 용동에 자면회를 세우고 1천여평의 땅을 기증하여 공동경작제를 실시하였으며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이상재, 유진태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설립하고, 자신이 교장과 이사장을 지내며 분신처럼 생각했던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교육 사업을 계속했다.
학교를 운영하며 실력양성론을 주창했고 그의 영향을 받은 조만식을 영입해서 교사로 삼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에게 학교의 경영권을 물려주려 하였으나 조선총독부 당국의 방해로 실패했다. 그의 오산학교에서는 류영모, 함석헌 등의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1930년 사망하면서 경성제국대학에 시신 기증을 약속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시신을 교육용으로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행하지 못하고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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