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31. 16:25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양진여 선생(1862.5.11~1910.5.30)
일제의 광주수비대를 격파한 평민 의병장
무릇 왜적(倭賊)은 우리의 하늘에 사무치는 원수인 것이다... 오늘 행하지 못하면 내일 행할 것이요, 금년에 죽이지 못하면 내년에는 기필코 죽이기로 맹서하였다. -호남 의병장 격문 中
독립운동사를 살펴보다 보면 이력이 독특한 인물들이 있다. 부유한 집안이며 나라를 다스리던 양반으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조국의 안녕을 위해 뛰어든 사람들, 10대의 나이에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 그리고 한 가족 전체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들. 이 중에서도 부자가 나란히 독립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같은 감옥에서 순국한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데 양진여 선생과 양상기 선생이 그 주인공이다.
양진여 의병장은 원래 학문을 공부해 과거를 보려 했으나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나라의 원수를 갚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하였습니다. 선생은 곧바로 담양군 삼인산에 풍정암 이라는 절을 지었는데 사실 이 절은 독립운동의 인재를 기르는 곳이었습니다.
선생은 전재산을 정리하여 인근 마을 10곳에 주막을 차려 의병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였고 이 일은 주로 선생의 부인 박순덕 선생이 도 맡았습니다.
선생은 아들 양상기 선생에게 서울로 올라가 나라를 위해 싸우라 말하였고 양상기 선생은
즉시 서울 시위대에 입대하였습니다.
1907년 7월. 고종황제의 특명을 받은 헤이그 특사 3인방의 노력이 실패로 이어지자 3인방 중 한명인 이준 열사 자결하였고, 이로인한 일제의 고종황제 강제퇴위 그리고 군대의 강제해산 소식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선생은 의병을 일으키게 됩니다.
아들인 양상기 선생이 강제 군대 해산으로 2년여 군생활을 접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 양진여 선생은 이미 의병장으로 활약 중이었습니다. 아들 양상기 선생이 광주경찰서에 들어가 총기 수십 정을 빼내어 의병을 일으키자, 부자가 각각 의진을 이끌게 되었고, 두 의진은 합진하여 의병투쟁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양진여 선생이 이끄는 의진은 그 해 겨울까지 주로 정읍•순창•고창•담양 등지의 일본 헌병대를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자 의병들의 활약상에 놀란 일본군 광주수비대장 요시다소좌는 이듬해 1월 여름 대규모 부대를 이끌고 의병 토벌에 나섰습니다. 이들에 맞서 전남 장성군 비치(非峙)에서 양진여 선생이 격전을 벌였지만 무기의 열세로 수십 명이 살상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고, 선생은 의진을 수습해 일본군을 쳐부술 기회를 엿보던 중, 인근 지역에서 활약하던 김태원 의병장이 지원 요청을 하자, 50여 명의 의병을 파견하여 무등촌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승리를 거둡니다.
양상기 의진은 주로 나주•동복•화순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펼쳤고 아버지 양진여 의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맹활약했습니다.
1908년 11월 어느날, 전라남도 지역의 의병들은 담양군 대전면 한재(大峙) 부근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각 지역의 의병장들이 힘을 합치어 연합작전으로 일본 광주수비대를 섬멸하기 위한 특별작전이 펼쳐졌습니다.
당시 한재를 중심으로 연합작전에 참여한 의병은 양진여 의진 300여 명, 영광에서 온 전해산 의진 300여 명, 화순•동복에서 온 아들 양상기 의진 200여 명 등 연합의진의 규모는 900여 명을 넘었습니다. 의병들은 12일 동안 격전을 벌여 많은 적을 베었지만 피해도 막심했고 양진여 선생마저 총상을 입었습니다.
선생은 상처를 제대로 치료도 못하고 계속 의진을 이끌어야 했으나 겨울로 접어들며 의병들의 사기가 점점 떨어져갔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양진여 선생은 소규모 분대를 꾸려 일제와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특히 선생의 유격전 중 광주•나주•영광•장성 등지의 일본 헌병 분견소를 공격이 유명합니다. 그러나 이 유격전에서 선생은 또다시 크고 작은 총상을 입었고 더 이상 의진을 지휘하지 못할 만큼 몸이 상하게 됩니다.
당장 치료를 시작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처한 양진여 선생을 그의 부하들은 갑향골로 데려간 후 치료를 시작합니다. 지휘관을 잃은 선생의 부대가 와해직전 무렵, 일제는 선생의 은신처를 파악해냅니다.
1909년 8월 25일. 갑향골 주막 주변.
영산포헌병대 광주분견대의 가지무라 중위가 이끄는 정찰대는 '남한폭도 대토벌작전' 의 1단계 작전으로 의병장 토벌을 나섭니다. 결국 이곳에서 양진여 선생은 가지무라 중위에게 체포되었는데 법정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습니다.
“내 한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이 유감이다.”
1909년 12월. 의병 전투를 54차례 펼치며 큰 활약을 한 아들 양상기 선생마저 체포되며 대구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됩니다.
양진여 선생의 부인과 막내아들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서 갖은 고문을 당해 폐인이 되었는데 막내아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26세에 숨졌고, 아내는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었으며 고춧가루를 탄 물을 눈에 계속 부어 평생 피눈물을 흘리며 살다 광복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한 많은 세상을 등지셨습니다. 양진여 선생의 친동생 양서영 선생 또한 독립운동을 하다 유배 형을 선고 받으니 온 가족이 국가를 위해 뛰어들었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왜 지금까지 이런 분들을 모르고 살았었는지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죄송한 마음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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