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학도, 의열단원이 되다. 최수봉선생

2024. 7. 8. 11:05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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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시절,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곳으로 악명높았던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이있다. 바로 최수봉 선생이다.






밀양의 학도, 의열단원이 되다.






선생은 1894년 경남 밀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향리 개량서당에서 지식을 배웠다. 최수봉 선생은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 선생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둘은 친구였다. 당시 일본인 교사가 우리의 역사를 말하며 단군이 일본 대화족 시조의 아우라고 말하자 거세게 항의했고 그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1910년 밀양에서 사립학교인 동화학교에 편입해 독립운동가 김대지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항일의식이 점점 고취되었다.

1913년 기독교 계통 평양 숭실학교를 다니던 선생은 학업을 중퇴하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길에 뛰어들었다.




1919년 고향 밀양으로 돌아와 의열단- 조선의용대의 대장 윤세주 장군, 윤치형 선생과 함께 3월 13일 밀양 장날에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 일로 인해 일본의 요시찰 인물로 선정된 선생은 수배를 당하며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동지들과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당시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은 봉천(선양 지역), 안동(단둥 지역)이다.




이 시절 길림에서 선생은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동지들로부터 폭탄제조법을 배운뒤 고향 밀양으로 돌아왔다.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다.

1920년, 의열단이 국내 일제기관 거사 계획을 세우고 폭탄을 밀반입하려다 일제 경찰에 적발되어 여러 단원들이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최수봉 선생은 이종암 선생등과 식민통치의 폭압기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거사를 도모하기로 결심한다.





1920년 12월 27일 월요일 아침.

밀양경찰서장이 경찰서 직원 19명을 사무실에 모아 놓고 연말연시 특별경계를 당부하는 훈시를 하던 때 최수봉 선생은 번개같이 달려들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폭탄은 안타깝게도 불발하였고, 일제 경찰의 추격이 이어지자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그것마저 실패하고 피체 당하고 말았다.



최수봉 선생에 대한 재판은 상고심까지 진행되었으나 일제는 의거의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재판을 속전속결로 진행해 선생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비록 선생의 폭탄 의거는 실패했지만 독립에 대한 의지는 성공했다. 일제 시설의 한복판에 폭탄을 던져 넣었다는 것은 당시 조선의 청년들을 고무시켰고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