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오성술 선생(1884.5.15~1910.9.15)

2024. 9. 16. 01:23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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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오성술 선생(1884.5.15~1910.9.15)

"호남 벌판 지킨 의병장"

독립운동가 오성술 선생은 호남 벌판을 지켰던 의병장으로 유명합니다.
어릴적 오성술 선생은 면암 최익현 선생의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는 공무원의 신념, 지식인의 자세, 매국대신들의 처단을 요구하며 의병항쟁을 주창하는 모습에 감동받아 최익현 선생을 존경하며 선생의 강론에 참석하였습니다. 최익현 선생의 강론이 끝났을때 오성술 선생은 의병부대를 만드는 의사를 밝혔고 최익현 선생은 매우 대견해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합니다.
“나는 이미 늙은 몸, 그대와 같은 열혈 청년들이 나서겠다니 마음 든든하네. 천하대세와 국세민계(國勢民計)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일사보국(一死報國)할 기회가 온 것 아니겠는가. 한시도 지체하지 말기 바란다.”
강회 참석 후 귀향한 선생은 곧 바로 의병부대의 창립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손자병법같은 병서를 탐독하며 병법을 익히고,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신분의 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이라 생각되는 이유는 독립운동에 귀천이 어디있으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남자와 여자를 왜 구별해야하며, 나라를 지키는데 신분이 왜 중요하냐는 정신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그러던 중, 1906년 6월 최익현이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부대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의병항쟁의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는데 이때 선생이 아버지에게한 말이 역사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버지, 국가흥망이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소자 비록 백면서생이오나 혈기방장하온데 썩은 선비들처럼 글만 읽고 앉아 있겠습니까. 면암 최익현 선생의 뒤를 따라 국적(國賊)을 몰아내고자 하오니 의병부대 창립에 필요한 자금을 승낙해 주십시오.”

부친은 선생의 뜻에 감화되었고 전적으로 찬성하여 군자금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선생은 이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본격적으로 동지규합에 나섰다. 드디어 1907년 2월 선생은 격문을 띄우고 거의함으로써 구국 의병항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수학하던 용진산을 근거지로 하여 2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의진을 편성한 것이다.

선생은 독립 의병부대를 이끌면서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에 침투하여 경제침탈에 앞장선 일본인 소유의 농장을 우선적으로  공격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일본인 지주들이 한국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점령하여 본인들의 농장을 설치하고 곡물을 수탈하였기 때문에 무고한 조선의 농민들이 입고있던 피해가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첫 공격이 농장을 공격한점을 보아도 선생의 의병부대원 출신중 농민이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정말 현실적인, 지금 당장 피눈물을 흘리고있는 우리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1908년 초 부터 대대적인 의병부대 탄압 작전을 실행합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의병장들과 독립운동가들은 총살되거나 체포되었는데 특히 의병부대에 대한 대우는 가장 잔인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의병활동을 하면 이렇게 된다는것을 과시하여 독립운동을 못하게 하려는 전략이었던 것이죠. 실제로 수많은 의병영웅들을 공개 처형하였고 길거리에 목을 걸어두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수많은 의병 지도자들과 창립멤버들이 순국은 전체적인 의병부대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고 의병부대의 암흑기가 찾아옵니다. 오성술 선생은 이때부터 전략을 바꿔 친일파의 처단에 앞장서기 시작합니다. 즉 군인에서 의열투쟁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선생이 이러한 결정을 한 이유는 당연했습니다. 당시 친일 밀정들이 의병부대의 작전계획 및 위치를 일본군에 알려줘서 피해가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1909년 8월 선생의 의병부대가 용문산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대와 선생을 비롯한 30여 명의 의병부대는 숫적인 열세와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부 전사하였고 선생만 간신히 목숨이 붙어 일본 헌병대에 감금되었습니다. “최후의 하나까지 싸우다 죽자”고 하면서 결사 항전을 결의하였다.

1907년 부터 3년간 광주․나주․담양․함평․고창 일대를 누빈 선생의 항일 의병투쟁이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선생은 교수형을 선고 받았고 1910년 9월 15일 대구감옥에서 형 집행으로 26세의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