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南平) 윤주석(尹柱石·1889∼1954)

2024. 9. 20. 12:59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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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南平) 윤주석(尹柱石·1889∼1954)

: 일제강점기 중국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 창구역할을 했던

  부산 백산상회에서 독립자금 총괄



*백산상회(白山商會), 백산무역주식회사 (白山貿易株式會社)

: "독립운동 자금의 6할 이상이 백산상회로부터 왔다." (백범일지, 백범 김구)

: 1919년 안희제(安熙濟)가 설립한 민족기업. 1916년 자본금 13만원(圓)으로 설립되어 곡물 · 면포 · 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개인 상회처럼 보였으나 이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속임수로서, 내실은 독립운동 진영간의 연락과 그 자금 공급에 목적을 두었다. 이 상회가 1919년 5월 자본금 100만원의 주식회사로 개편되었다.
후손 인터뷰 영상



약력

1915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상과 졸업

1916 백산상회 서기 근무

1916-1920 백산상회 자금 및 조직관리 총괄

1919. 5 백산주식회사로 개편

1920-1927 경남은행 하동지점으로 이직

1927년 백산상회 폐업

윤주석 선생은 1915년 현 고려대학교인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했고, 다음해 백산상회 서기로 근무를 시작했다. 1916년부터 1920년까지 백산상회에서 일하며 1919년 3.1운동 이후 남형우(南亨祐, 상해임정 법무총장, 교통총장 역임)와 윤현진(상해 임정 재정차장)이 상해로 파견되자 경비를 조달해 주었다.  상해 임시정부 재정차장 윤현진은 백산상회 발기인이자 초기 멤버인 윤현태의 친동생이다.

1919년 5월 백산상회는 최준, 최태욱, 윤현태, 윤상태, 강복순 등 영남의 대지주를 주주로 하는 주식회사로 개편되었다. 이때 하동에서는 지주 정재완(鄭在涴), 문영빈(文永彬) 등이 출자하여 대주주가 되었다.

1919년 6월 안희제, 윤현태 등이 단원이었던 비밀 결사 <조선 국권 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활동이 일제 당국에 발각되면서 백산 무역 주식회사 간부와 대다수 주주들이 조사를 받았다. 이후 백산 상회는 경찰의 감시를 받으면서 활동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때 백산 안희제는 남평 윤주석을 경남은행에 취업시킨다.



경남은행 (慶南銀行)

: 1915년 부산에 설립된 은행

: 경상남도 일대를 영업권으로 했던 최초의 민족계 지방은행이다.

1909년 윤상은이 설립한 구포저축주식회사가 모체인데 1915년 1월 본점을 구포에서 부산으로 옮기면서 개편 설립되었다. 자본구성은 구포은행의 구조를 계승, 윤상은(尹相殷)을 비롯한 지주계층과 장우석(張禹錫)·이규직(李圭直)이 중심이 된 상공인계층의 자본합작을 주축으로 하였다. 최고경영진은 두취(頭取)에 이규직, 전무에 윤상은, 감사역에 장우석이었다. 1918년 마산과 하동에 지점을 개설, 영업권을 확장하였으며, 1918년 12월 주일은행(主一銀行)을 흡수, 합병하여 자본금을 100만원으로 증자하여 영남지방 최대의 은행으로 발전하였다. 운영에 있어 특기할 사실은 국내외의 독립운동자금을 공급하였는데, 그것은 운영실권자이던 윤상은이 독립운동자금 제공을 목적으로 하는 대부에 각별한 편의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20년대의 경제공황으로 인해 영업부진을 면하지 못한 채, 1928년 7월 자본력이 강한 대구은행과 합병, 경상합동은행으로 개편되었다.
1920년부터 1927년까지 남평 윤주석은 경남은행에서 매년마다 초고속 승진을 했는데 그 연유가 훗날 밝혀진 백산 안희제 선생이 남평 윤주석 선생에게 보낸 편지와 함께 찍은 사진에서 발견되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이 경남은행에 근무하고 있는 남평 윤주석 선생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둘째문단 시작부분이다.

"은행(경남은행)과 상회(백산상회) 업무는 차이가 있다고 듣고 있지만 일심으로 견습하여 나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어떻고 어떻겠습니까? 지배인 김선생도 정성스럽게 인도해 줄 것입니다. 이런 점을 깊이 헤아려주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크게 3가지다.

첫째. 남평 윤주석 선생은 백산상회에서 근무했다. 백산상회는 독립운동 단체이다.

둘째. 남평 윤주석 선생이 넉넉한 봉급을 받지 못했고, 일반 직원의 입장이 아니었다.

셋째. 경남은행으로 간 것은 백산 안희제의 배려였으며, 경남은행 역시 독립운동 단체로 들어간다.



백산상회 대다수가 건국훈장을 받았고, 당시 동지적 관계로서 내 뜻을 이해해주고 그곳에서 함께 날을 도모하자는 편지는 일반 직원이 아닌 독립운동의 일환(방략)으로 남평이 뜻을 함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경남은행 역시 대다수가 독립운동가로 훈장을 받았으며 일제의 탄압이 심각했다.





1921. 3. 5 경남은행 신임지점장 취임식후 사진.

앞줄 왼쪽부터:  확인안됨, 이우식(건국훈장), 김양태(신임 지점장), 안희제 (건국훈장)  

뒷줄 맨오른쪽 흰 한복: 남평 윤주석 (당시 하동지점 서기)



1924.10.11 하동군민대회 발기총회, 경남은행 하동지점 직원들과 백산 안희제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백산안희제, 네번째 남평 윤주석

섬강한시회 활동

남평 윤주석 선생은 '섬강한시회(蟾江漢詩會)’를 주관, 안희제(의령 출신·건국훈장), 방정환(아동문학가·건국포장), 이승훈(전 동아일보 사장·건국훈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여러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시국을 논했다.

선생의 유품 중에는백산 안희제가 지은 시 1편과 소파 방정환이 지은 시 1편, 남강 이승훈(기미독립선언서 서명 33인중 1인)의 시 3편을 비롯해 한시 64편(광복 전 44편, 광복 후 20편)과 선생이 지은 노래, 타령 16편이 있다.

하동출신 독립운동가 김승탁(적량면·건국포장·2019)과 김응탁(하동 ‘대한독립선언서’ 서명 12인 중 1인)의 첫째 형인 김경탁(金景鐸) 선생의 한시 4편도 처음으로 확인됐다. 김경탁 3형제의 독립운동이 윤주석 선생이 주관한 ‘섬강한시회’ 활동을 통해 밝혀진 것이다.



정리

남평 윤주석 선생의 활동은 크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백산상회 활동

2. 경남은행 활동

3. 섬강한시회 활동



이 세가지 활동의 공통점은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들과 늘 함께 였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과 함께 초기에 함께 독립자금 조달일을 했던 30대 초반 청년

3.1운동 이후 경남은행으로 이직하여 독립자금 조달일을 했던 30대 중반 충년

그후 문학활동으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한시, 노래, 타령으로 당시의 삶을 기록한 40대 청년



당시 사진을 남긴다는 것의 의미를 아는 독립운동가들이 남평 윤주석 선생과 함께 경남은행 시절 2번이나 사진을 남겼다는 것과 공개된 백산 안희제 선생의 편지는 남평 윤주석 선생이 자신의 전문성을 활용하여 자신만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애국지사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남평 윤주석 선생은 정확히 백산상회가 폐업한 1927년 경남은행에서 나온다.

윤주석 선생과 같이 당시 의열투쟁이 아닌 독립운동의 방략을 선택했던 선열들의 경우 과거 국가보훈부가 원호처 시절 생전 독립지사들의 '인우보증'으로 많은 부분이 해결되었으나, 2024년 지금 이 일들을 증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윤주석 선생의 후손으로부터 받은 제보를 시작으로 기존의 백산상회와 경남은행에서 일했던 인물들 중 아직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지 못한 인물들이 여러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를 통시적으로 살펴보아 역사에 가려지고 잊혀진 선열들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더 많은 관심과 전문가들의 노력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이분들의 행적이 제대로 평가받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그분들은 드러내지 않았으나 그분들을 드러냄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의 부채의식은 아닐까?



참고문헌

남평 윤주석 선생 유고집 (세종문화사, 2009)

『조흥은행육십년지』(조흥은행, 1957)

『한국금융사연구』(고승제, 일조각, 1970)

『한국기업가사』(조기준, 박영사,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