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신규식 선생 (1879. 1. 13 ~ 1922. 9.25)

2024. 9. 25. 09:17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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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신규식 선생 (1879. 1. 13 ~ 1922. 9.25)

임정외교의 길을 열다


신규식 선생은 중국에서 우리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외교적으로 노력한 숨겨진 주역이며, 국력 배양과 민중 계몽 등 자립기반 확충 운동을 총체적으로 전개한 애국자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육군참위'로서 지방군대와 연계, 대일(對日)항전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3도 유생들이 조약 철회를 상소하고,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피를 토하듯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다.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등의 관리는 자결했다. 민심이 가마솥 끓듯 펄펄 끓을 때였다.

청년장교 신규식은 계동․가회동․운니동 등의 대문들을 골라 몽둥이로 후려치며 미친 듯 소리 질렀다. “을사오적들은 나오너라!” 신규식은 호랑이라도 잡을 듯 거리를 쏘다녔지만 역부족이었다. 운니동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한낱 미약한 존재였음을 확인했을 뿐이다.

선생은 사흘을 문을 걸어 잠그고 굶었다. 그리고 결국 결론을 내렸다.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등의 순국은 소극적 행동이 아니라 적극적 투쟁이였다는것을.

“죽음은 거름의 역할을 하는 것. 내 한 몸 거름이 되어 무수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

당시 26살 신규식 선생의 이런 생각은 후일 ‘치욕을 알면 피로써 죽음을 할 수 있고, 치욕을 씻으려면 피로써 씻어야 한다’는 투쟁적 신념으로 바뀐다.

신규식 선생은 독약을 마셨으나 문을 부수고 들어온 가족들에 의해 겨우 목숨을 구했으나 약 기운이 번진 오른쪽 눈은 시신경을 다쳐 애꾸가 되었다. 거울을 들여다 본 신규식은 냉소를 지었다. “애꾸, 그렇다. 이 애꾸눈으로 왜놈들을 흘겨보기로 하자. 어찌 나 한 사람만의 상처이겠는가. 우리 민족의 비극적 상징이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뒤, 선생은 상하이로 망명하였고 12년간 위대한 업적을 남긴다.
우선, 당시 독립운동의 큰 노선이었던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 두가지를 조화시켰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신규식 선생은 중국신해혁명에 외국인으로 참가하여 중국 국민당정부의 지원과 항일투쟁의 지원에 큰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1919년 3.1 만세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큰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1921년 임시정부는 혼란기를 겪게되었고 임정이 분열되기 시작하자 이에 통분한 선생은 병에 걸렸다. 병석에서 선생은 국내외에서 이렇게 모든 것을 내던지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국인들이 서로 단합되지않는 모습에 매우 비통해했고, 아무것도 먹지않고 아무말도 안하며 아무약도 먹지않기를 선포했다. 결국 25일간의 단식끝에 선생은 생을 마감하였고 죽기 직전의 단어는 '정부....정부..'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