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상정 선생 1896.6.10. ~ 1947.10.27.

2024. 10. 28. 15:03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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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상정 선생 1896.6.10. ~ 1947.10.27.



교사에서 장군이 된 예술가.

1917 대구 계성학교 교사

1926 중국 국민당 펑위샹 군 참모부 활동

1937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 주도

1938 중국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 교관

1942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

1945 신한민주당 창당, 흥사단 입단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군에서 활동한 장군이며 해방 이후 중국에서 한인들의 귀환에 힘썼다. 유고집으로 『표박기』가 있고, 시(詩)·서(書)·화(畫)에 능하였다.



이상정 선생은 1896년 대구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형제들은 모두 대한민국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지은 시인 이상화(1901~1966)가 둘째,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 이상백(1904~1966)은 셋째, 수렵가이자 저술가인 이상오(1905~1969)는 넷째 동생이었다.



1910년 초 이상정은 일본에 유학하여 역사학, 미술, 군사학을 배웠다.  특히 예비군사교육기관의 성격을 가진 성성중학교에서 수학한 경험은 훗날 중국군에 복무할 수 있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1917년경 국내로 들어와서는 대구 계성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했다. 1920년 초 정주의 오산학교, 평양의 광성고보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까지 그는 예술과 군사학을 공부한 교육자였다.



1925년 이상정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다음 해 인생의 짝인, 위대한 여성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권기옥과 결혼했다. 권기옥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조종사이자, 군인이고, 독립운동가였던 인물이다. 특히 대한민국 공군의 초석을 닦은 초창기 인물 중 한 명으로 그 위상과 업적이 대단하다.



이들 ‘부부 독립운동가’는 광복이 될 때까지 내몽고, 베이징, 상하이, 난징, 충칭 등 중국 대륙을 다니며 부부이자 동료로서 독립운동을 함께했다.



이상정은 이 시기 중국군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항일전선의 선두에서 활동했다. 1926년 중국 국민당 펑위샹 군 참모부에서 근무했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중국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 소장교관으로 취임하여 한중연대에 주력했다.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결성을 주도하여 한국독립운동 진영의 민족통일전선운동에 적극 나섰으며,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에 선임되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임시정부의 개조와 통합을 주장하여 변화를 모색하였고, 중국군이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제약하려 할 때는 자주적 관점에서 강력하게 이를 비난했다.



광복 직후에는 상하이로 가서 한인의 권익 보호에 힘썼다. 1947년 7월 모친상으로 9월에 귀국했고, 10월에 뇌일혈로 별세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