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12. 16:32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후세 다쓰지(후세 다츠지)
1880년 11월 13일 ~ 1953년 9월 12일
국적: 일본
직업: 검사-> 인권변호사 -> 사회 운동가
특징: 2004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최초의 일본인 독립운동가이자 유공 수훈자)
한국 정부가 건국 훈장을 수여한 후세 다쓰지는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일본의 조선인 토지 강탈에 대항해 한국인을 변호했으며, 1919년 2월 8일 독립선언서 발표 후 체포된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을 대변했다. 또 '조선독립운동에 대해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로 세상에 3·1 운동 소식을 알렸고,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후 일본의 한국인 학살사건의 보고서를 작성해 이를 막지 못한 참회의 글을 남겼다.
어릴 적부터 묵자의 겸애 사상을 접하게 된 이 아이는 신학교에 들어간다.
1880년대 동학농민운동 이후 운동을 진압하러 갔다가 돌아온 귀향 군인들이
“일본도를 한번 날리니, 조선인 두 놈의 목이 동시에 떨어졌다”는 ‘무용담’을 들으며 그는 처음으로 조선인에 대해 동정과 연민의 정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 후 처음으로 도쿄의 메이지 법률학교(오늘날 메이지 법대의 전신)에서 조선인 친구를 만나 그들과 어울리며 조선의 현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톨스토이의 책을 사랑했으며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후 우쓰노미야 지검 검사로 부임한다. 그러나, 검사로 활동하던 어느 날 그는 가난한 생활고로 인해 어머니와 아들이 동반 자살을 시도한 비극적인 사건을 맡게 되는데, 이 사건의 결과 아들은 죽고 어머니만 기적적으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살인미수로 기소하여 무기징역에 처하게 하라는 검찰의 압박에 법률의 미비함과 법 윤리, 법 도덕의 철학적 갈등 속에서 검사직을 벗고 그때부터 인권변호사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검사로서는 도저히 사회적 약자를 도울 수 없다는 자각이 컸다. 그는 우리 대한민국의 독립역사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게 되고 훗날 조선의 후손들에게 최초로 일본인 독립운동가로 선정되는 명예를 부여 받는다. 그의 이름은 후세 다쓰지다.
후세가 마침내 ‘자신이 가야할 길’을 결심하고 이를 대외에 공표한 것은 마흔 살 때인 1920년이었다. 5월 15일 지인들과 언론에 배포한 ‘자기혁명의 고백’은 “평생을 탄압받고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서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명이었다. 후세는 ‘고백’에서 “앞으로 주요 활동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구체적으로는 ‘자본가와 부호의 횡포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사건’ ‘인간차별에 맞서 투쟁하는 사건’ 등 변호활동의 기준을 마련했다. ‘조선인과 대만인의 이익을 위한 투쟁사건’도 그 기준 속에 있었다. ‘자기혁명의 고백’은 1920년 6월 1일 창간한 자신의 개인잡지 ‘법정에서 사회로’에 실려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후세는 ‘자유법조단’을 결성,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조선인과 관련된 사건이라면 그것이 독립운동이든 사회주의운동이든 아나키스트운동이든 운동의 성격을 가리지 않았다.
1923년 8월 1일 새벽, 후세는 처음으로 서울 경성역에 도착했다. 처음 밟아보는 서울 땅, 오래전부터 방문하고 싶었던 그곳. 후세가 경성에 올 때 간직했던 3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의열단원 김시현을 변호한다.
둘째. 형평사 운동에 힘을 실어준다.
셋째.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의 사상단체 ‘북성회’가 주최하는 순회강연에서 연설한다.
우선적으로 힘든 일정에 몸이 피곤했음에도 그날 서울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열린 북성회 주최의 강연회에서 후세는 ‘인간생활의 개조운동과 조선민족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일제를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그 자리에는 일본 고등계 형사도 있었고 수차례 후세에서 경고를 보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의견을 연설했다고 한다.
그 후 의열단원 김시현에 대한 변호를 맡았는데 김시현은 김지섭 등 의열단원들과 함께 총독부, 경찰서, 동양척식회사 등 주요 건물을 1923년 3월 15일 일제히 폭파하기 위해 사전준비를 하던 중 의열단 안으로 파고든 밀정의 밀고로 체포돼 재판을 받고 있었다. “‘흉계’로 포박함은 정치도덕에 위반하는 것”이라는 후세 변호사의 변론에도 불구하고 김시현은 1923년 8월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5년 5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마지막으로 1923년은 형평사(衡平社) 운동이 전국에서 맹렬히 전개될 때였다. 형평사 운동은 이 땅의 마지막 차별적 존재였던 백정들이 그들의 권익을 확보하고자 전개했던 차별 철폐 운동이었다. 1923년 4월 25일 경남 진주에서 발족된 후, 보수적인 양반과 일부 농민들의 반대 속에서도 세를 규합해 나갔다. 후세 변호사는 지방으로 순회연설을 도는 한편, 형평사 운동 관련자들을 만나 지지·격려한 뒤 1923년 8월 말 조선을 떠났다.
후세의 조선인 변호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919년 도쿄의 2·8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최팔용, 백관수, 송계백 등 조선청년독립단의 변호를 맡았었다. 당시 그는 “만약 일본 재판관이 이를 내란음모 등 중죄로 다스린다면 일본은 그야말로 무법의 야만국가로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백관수 회고록)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1923년 8월 말 한 달간 조선에서의 연설과 변호와 격려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9월 1일의 관동대지진이었다. 일본 전체가 공포와 혼란에 휩싸였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들이 시내 곳곳에 불을 질렀다”는 유언비어로 조선인에 대한 악감정이 극에 달했다. 일본도와 죽창으로 무장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발견하면 막무가내로 무기를 휘둘렀다. 계엄군·경찰들까지 일본 정부의 ‘불령 조선인(不逞朝鮮人) 단속 공문’을 빌미 삼아 폭력에 가세했다. 후세는 겁에 질린 100여명의 조선인을 받아들여 숙식을 제공하는 한편 유언비어를 날조한 계엄당국과 경찰서를 항의 방문해 야만적 행위를 따져 물었다.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후세와 인연을 맺게 된 대표적 인물이 박열(1902~1974) 열사다. 박열은 일본 천황을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애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1924년 1월 ‘대역죄’로 기소됐다. 후세 변호사는 법정에서 “조선인 학살이라는 범죄행위를 감추기 위해 조선인의 범죄를 조작해낸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했으나 박열과 가네코는 1926년 3월 25일 사형을 선고받고 열흘 후인 4월 5일 무기로 감형됐다. 사형선고가 있기 전인 3월 1일, 후세 변호사는 박열과 가네코의 옥중 결혼식을 성사시켰다.
1926년 7월 23일 가네코가 창살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의문의 죽음 소식이 전해졌다. 후세 는 박열의 동지들과 함께 야밤에 가네코가 묻혀있는 곳을 찾아가 시신을 발굴·화장해 유골을 자기 집에 안치했다가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박열의 친형에게 전해주었다. 유골은 1926년 8월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 팔령산에 묻혔다.
1924년 1월, 김시현과 함께 8개월 전 서울에서 일제의 주요 건물을 폭파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돼 상하이로 탈출했던 김지섭이 천황을 폭살할 계획으로 도쿄에 잠입했다. 김지섭은 1월 5일 황궁과 가까운 ‘이중교’에 폭탄을 투척한 후 체포돼 후세가 변호에 나섰으나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김지섭은 복역 중 단식투쟁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1928년 2월 20일 일본 땅에서 순국했다.
후세가 두 번째로 조선을 방문한 것은 1926년 3월이었다. 동양척식회사의 토지수탈에 항의하는 전남 나주군 궁삼면 농민들이 직접 일본으로 찾아와 혈서와 소송의뢰서를 건네며 도와줄 것을 부탁한 게 방문의 계기가 됐다. 당시 궁삼면에는 “왔소! 왔소! 후세씨 우릴 살리러 또 왔소!”라는 환영 벽보가 붙을 정도로 후세에 대한 기대가 컸다. 후세는 토지수탈 현장을 정밀 조사했으나 총독부 고등계 형사들의 방해로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조사 후 “동양척식회사의 합법적 사기사건”이라고 거세게 항의해 총독부와의 협상을 이끌어냈다.
日정부에 맞서다 3차례나 변호사 자격 박탈
후세 변호사는 1927년 10월과 12월, 두 차례 더 조선을 방문했다.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변론이 목적이었다. 그는 “이 사건은 반항할 수밖에 없는 조선 민족 전체의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재판소는 양심에 따라 조선 민중의 비통한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변론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1928년 2월 13일 김재봉과 강달영에게 6년을 선고하고 다른 수십 명에게도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1920~1930년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상세히 보도되면서 ‘조선 민족의 은인’으로 불렸다.
후세 변호사는 1927년 12월의 방한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조선 땅을 밟지 않았다. 대신 전시체제로 전환된 1930년대 일본에서 일본 정부에 맞서다 세 차례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1933년과 1939년 각각 3개월, 400일씩 두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1944년 2월 후세 변호사를 깊은 슬픔에 빠뜨린 일이 있었다. 교토대학생이던 셋째 아들이 전쟁을 반대하다 치안유지법에 걸려 교토형무소에서 옥중사한 것이다. 더욱이 평소 아버지의 활동을 반대하던 장남이 “동생까지 죽이고…”라며 아버지를 원망해 이중으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래도 그는 “내 아들이 전쟁터에서 죽은 것보다 전쟁을 반대하면서 감옥에서 죽은 것이 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떳떳이 말했다.
‘좌파 변호사’ 잘못 인식 탓에 한국에선 잊혀져가
후세 변호사는 1945년 일본 패망 후에도 재일 조선인과 관련된 사건이라면 무료 변론을 자처했다. 1946년 4월에는 태평양전쟁 말기부터 집필해 온 7장 63조로 구성된 ‘조선 건국 헌법초안 사고(私考)’를 완성해 한국으로 돌아가는 박열 등 독립운동가들에게 선물로 건네주며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도록 기원했다.
1949년 11월 12일 메이지대학 대강당에서 ‘후세 다쓰지 탄생 70년 축하 인권옹호선언대회’가 열렸을 때 3000여명의 청중 가운데 재일 한국인이 800여명이었다. 한국인과 후세 변호사는 이미 정서적으로 하나였다.
그런데도 광복 후 국내에서 후세 변호사가 잊혀진 것은 ‘좌파 변호사’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에 대한 평가는 “톨스토이에 심취한 인도주의자로서 사람마다 인격적으로 평등하듯이 국가 또한 평등하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는 게 일반적이다. 후세 자신도 한 법정에서 “나는 약한 자를 변호하는 해방운동가이지 결코 마르크스나 레닌을 표방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실제로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조선 건국 헌법초안 사고’가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대통령중심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1953년 9월 13일 타계한 그의 도쿄 이케부쿠로 상재사(常在寺) 묘비에는 ‘살아서 민중과 함께, 죽음도 민중을 위해서’라는 생전의 좌우명이 새겨졌다.
독립운동가 영화에서 이슈가 되어 최근에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온 후세 다쓰지
영화 박열에서 주인공 박열은 “난 일본 권력에 반감이 있지만 민중에겐 오히려 친밀감이 들지” 라고 말한다. 후세 다쓰지, 가네코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정의롭거나 한국을 도왔던 일본의 민중들이 있었다. 우리가 오늘날 막연히 일본을 비판하고 감성적으로만 대응한다면 시대착오적이라는 오명과 현실감각 없는 시민이 될 뿐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정신, 그들의 희생, 후손에게 물려준 독립과 자유,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과 역사왜곡 그리고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는 일본정부의 위선적 태도이다.
이것은 역사의 정의를 위해서 그리고 진정으로 한일 양국이 과거를 청산하고 진심 어린 우호적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꼭 필요한 절차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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