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10. 09:17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이봉창 선생(1900.8.10~1932.10.10)
용산의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게 점원과 철도 운전 견습생 등으로 일하다가 1919년 이후 일을 그만두고 동해를 건너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뒤 조카인 이은임과 함께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 철도국을 그만 둔 일본인 지인이 조선인 식모를 구하여 데려가고 싶다는 의사를 타전해오자 자신의 조카딸인 이은임을 식모로 주선하여 여비를 받았다. 이 여비로 일본인, 조카 이은임 등과 함께 배편으로 일본으로 건너온다.
1930년 30세의 이봉창은 미혼이었다. 일본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여행과 함께 노동으로 허기를 채우며 적정을 정탐하기에 힘썼다. 1931년 나고야에서는 병이 들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한 친구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게 되어 병세가 호전되었으며, 친구는 어느 일본인의 사위가 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봉창은 친구의 청을 거절하고 도쿄, 오사카 등지를 돌아다녔다. 이때 일본인의 말과 몸짓을 흉내내는 재주를 익혔다
1931년 1월 중순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이후 생계비용이 필요하던 그는 상하이의 명선철공소에 입사하였으나, 임금이 너무 낮아 결근을 자주하다가 그만두게 된다.
그뒤 상하이에서 수소문 끝에 그는 1931년 1월 이봉창은 이름도 모르는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을 만나 그로부터 임시정부 통신처의 주소를 전해 듣고 바로 그곳으로 찾아갔다. 밤중에 찾아오자 2층에는 비밀회의를 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갑자기 허름한 손님이 나타나 일본어가 섞인 한국어를 하고 행색이 몹시 수상해 보이므로 들이지 말라고 하였다. 이봉창은 들여보내 달라고 간청하자 임시정부의 사람들은 그를 더욱 의심하였다.
그가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고 있었고 일본식 옷에 게다(일본 나막신)를 끌고 다니는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람들에게 상당히 거슬렸다. 임정 요인들은 그를 왜늙은이라 하여 일단 경계하였다.
임시정부 사람 중 2~4명의 청년들이 그를 일본의 밀정으로 여기고 급히 문밖에서 내쫓으려 했으나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애원하였다. 이때 김구는 2층에 있다가 지켜보고 그의 말하는 태도의 비범함을 간파한 뒤 잠시 인근 여관에 머무르도록 일렀다. 이봉창이 여관을 정하고 숙박하자 김구는 은밀하게 방문하였다. 처음에는 평범한 신변 이야기에 그칠 뿐이었고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이때 이봉창도 임시정부 통신처를 왕래하였으나 주위의 의심이 풀리지 않아 임정 사람들은 김구에게 그를 지나치게 가까이 하지 말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김구는 이봉창을 어떻게 시험할까 궁리하다가 3~4명의 청년을 데리고 그를 방문하였다. 방문후 연회를 마련하였는데 취중에 이봉창은 김구와 임정 요인들에게 일왕을 처단하지 못하느냐고 물었다. 주위 사람들이 이봉창을 비웃으며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왜 처단하지 못하느냐고 비판하자 이봉창은 '나는 작년에 동경에 있을 때 하루는 일본 임금이 하야마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구경하러 가서 한참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런데 임금이 내 앞을 지나갔다. 나는 이때 가슴이 일렁이고 온몸의 피가 솟구쳐올라 내게 무기만 있다면 큰일을 한번 해볼 텐데 하고 생각하던 중에 일왕이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버려 좋은 기회를 놓쳤다.'라고 말 하였다
김구는 이봉창의 말을 듣고 그를 비범하게 보았으나 못들은체 하고 내색하지 않았다. 이봉창의 취중 장담을 기억한 김구는 며칠 뒤 여관으로 다시 찾아왔고 이봉창은 계획한 바를 설명하였다. 김구는 그가 비범한 뜻을 품었고 여러 사람들이 의심한 것과는 전혀 다른, 성실하고 순박한 사람이라 깨닫게 되었다.
1931년 2월 김구는 이봉창에게 상하이 홍구 방면에서 종적을 감추고 일본인 행세를 하여 세간의 이목을 피하도록 권고했다. 그는 기노시타라는 가명으로 홍구에 거주하며 양수포의 일본인 인쇄공장에 취직하여 다녔고 몇 달 뒤에는 일본인 악기점의 종업원으로 근무하여 일본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김구 선생과 3,4개월에 한번씩 비밀리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뒤 정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가 양성하는 항일 독립운동 조직인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본 천황 히로히토 암살 계획을 세웠다.
그의 거사는 실패하였으나 그의 뒤를 이은 윤봉길은 1차 거사에 실패하고 2차 거사에 성공한다.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는 기사회생하는데, 이봉창과 윤봉길의 잇단 거사로 침체기에 빠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고 임정에 대한 한인 교민단체의 지원을 이끌어내는데 기여하게 된다.
광복 후 귀국한 김구는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다시 돌려받아 1946년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다. 이들의 묘역을 가리켜 삼의사묘(三義士墓)라고 한다. 효창공원 내에는 수류탄을 던지는 순간의 이봉창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세워져 있다. 김구는 그가 처형되던 그날 전체 단원에게 단식을 명하여 이봉창의 죽음을 추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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