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2. 09:26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1871.1.27~1917.3.2)
1907년,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그를 정사로 하고,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었다.(헤이그 밀사 사건 참조.) 고종의 밀지를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참석하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계략으로 참석을 거부당했다.
헤이그 밀사에 실패한 그는 1908년, 미국에서 대한제국의 독립 지원을 계속 호소하는 한편, 각지의 미주 한인교포를 결속시키는 데 힘쓰고, 콜로라도 주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 연해주 한인대표로 참석했다. 1909년, 국민회(國民會) 중심의 독립 운동 확대를 위해 이위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러시아와 만주 국경지방 사이 부근에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 운동 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을 건설했다. 1910년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쟁을 수행하고자 유인석, 이범윤, 이남기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하고, 퇴위된 상태에 있는 고종에게 13도의군 편성을 상주하고, 군자금의 하사와 고종의 러시아 망명을 권하는 상소문을 올려 망명정부의 수립을 시도했었다. 이해 1910년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연해주와 간도등의 한인들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한일합병의 반대운동을 전개했으며 미국, 러시아 제국, 청나라 등에 일제의 침략규탄과 한민족의 독립결의를 밝히는 선언서를 보냈다.
이해 일제의 교섭에 의하여 러시아 제국 관헌에 체포되어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으나, 다음해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이상설은 권업회를 조직하여 '권업신문'을 간행하고 한인학교들을 확장시키는 한편, 한인교포의 경제향상과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기관으로 발전시키는 데 힘을 썼다. 1914년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 제국령 안에서 규합한 모든 한인들을 모아, 한일합병 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 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대한 광복군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제와 러시아제국이 연합국으로 동맹하여 한인들의 정치, 사회 활동을 철저히 엄금했기 때문에 대한 광복군정부는 표면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 채로 해체되었고, 권업회마저 러시아 관헌에 의해 해산당했다. 1915년 상하이에서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등과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이상설은 1917년,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사했다. 그는 죽기전에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졌다.
'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립운동가 박찬익 선생(1884.1.2~1949.3.9) (0) | 2024.03.09 |
---|---|
독립운동가 우재룡 선생(1884.1.3~1955.3.3) (0) | 2024.03.03 |
독립운동가 안재홍 선생(1891.12.30~1965.3.1) (0) | 2024.03.01 |
독립운동가 나월환 선생(1912.10.14~1942.3.1) (0) | 2024.03.01 |
독립운동가 민긍호 선생(~1908.2.29) (4) | 2024.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