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양세봉 선생(1896.6.5~1934.8.12)

2023. 8. 12. 10:33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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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양세봉 선생(1896.6.5~1934.8.12)

친애하는 동지들, 이번 전투는 동포 동지들의 생사를 담판하는 결전입니다. 나를 따라 생명을 각오하는 동지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중략) 조국광복군과 동만 백만동포들의 생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우리는 일당백의 용감한 정신과 아울러 이번 전투에 승리의 믿음을 선포합니다.    - 1932년 양세봉 장군 연설문 中 -

양세봉 선생은 어려서부터 가정이 매우 어려워 남의 집에서 끼니를 때우며 살았습니다. 이 시기에 일본의 침략행위가 선량한 주민들까지 괴롭히고 온갖 더러운 행동을 자행하는 것을 보며 어쩌면 어린 나이부터 선생의 가슴속에는 피끓는 항일 의식이 싹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에 의하면,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처단하였을때 안중근 의사의 기개에 존경심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때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것도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1920년대의 선생의 기록은 천마산대에 가입하여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인데 비폭력운동에서 본격적인 무장투쟁으로 바뀐점에서 의식의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천마산대는 1920년 12월 청장년 500여 명으로 조직한 무장독립군으로서 재래식 무기인 화승총 및 적에게 빼앗은 무기로 무장하고 도내 각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의 주재소, 경찰서,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일제의 밀정과 경찰들을 처단하는 등 맹활약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젊은시절의 경험을 통해 훗날 선생은 참의부 소속의 소대장으로 임명이 되었고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국경지역인 압록강을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자 일제의 경비가 미치지 못한 만주 쪽 강변 절벽에 정예병을 배치하고 사이토가 압록강 경비선을 타고 지나갈 때 저격을 지휘했습니다.

경비선이 다가오자 사격이 시작되었으나, 의외로 사거리가 너무 멀었고, 경비선은 빗발치는 탄환을 피해 전속력으로 도주했죠. 결국 조선 총독 처단이라는 큰 일은 시도로 그쳤지만, 한국 독립군의 정보력과 실행력으로 일본의 간담을 철렁 내려앉게 한 당시 위대한 작전이었습니다.

특히 사이토가 3․1운동 후 소위 문화정치라는 미명으로 한국통치에 대하여 거짓 자랑만 하고 있었으니 그에게 폭탄적 경고가 되었음은 물론 대내외에 한국 독립군의 활동을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후 선생은, 일제 경찰대와 수시로 교전하였으며 항일 무장활동, 부일배(附日輩) 숙청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습니다.  

선생은 당시 민족 유일당 조직동맹을 '조선혁명당' 으로 개편하고, 그 직할부대인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여 참의부와 신민부에 있던 일부 병력을 흡수하여 군대를 통합시켰습니다.

선생은 부사령관이라는 중책을 맡아 적기관 습격 및 일제의 밀정처단 등 무장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더욱 위대한 업적은 한중연합작전을 체결하였고 당시 안좋았던 한국인의 이미지를 개선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입니다. 한중연합작전이 시작되고 선생의 조선혁명군은 일본군과 약 200차례 크고작은 전투를 치뤘고, 영릉가 전투, 홍경성 전투, 노구대 전투, 쾌대무자 전투에 연전 연승 그리고 대승을 거두며 일본군을 괴멸시켜 버렸습니다.

오죽하면 선생에게 패한 수치를 갚기위해 일본은 폭격기를 동원하여 공격하였고 선생은 중국 의용군 부대 1만명과 연합하여 동쪽과 북쪽을 동시에 공격하는 전략으로 총공격후 다시한번 일본군에게 승리하였습니다. 마침내 홍경성에 태극기와 청천백일기(당시중국국기)가 함께 바람에 펄럭이게 된 것입니다.

이 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를 치뤘으나 공군력이 없었기 때문에 점점 열세를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숫적으로도 부족한대 육군만으로 육군+공군의 부대를 이기려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결국 선생의 부대는 후퇴를 하게 되었는데 아래는 당시 중국 연합군 사령관의 기고글입니다.

"민국(民國) 21년 2월 8일 한․중 민중으로서 총이 있는 사람이면 총, 총이 없는 사람은 호미, 낫, 괭이 심지어는 단도까지 들고 나와서 동지들을 모았다. 이와 같은 호소에 호응하여 적을 격멸하기를 지원해 나온 자가 한국사람이 8백 명, 그리고 중국측에서는 전 자위단(前 自衛團) 용사 5백 명을 빼고도 2천 5백 명이나 되었다. 곧 맹세해서 의거를 일으켰다. 아 슬프다! 산하는 그대로 있건만 인사는 기대에 어긋났다. 양세봉 양하산 두 장군이 패배하였다.."

이 무렵 일제의 밀정 박창해(朴昌海)가 혁명군을 직, 간접으로 후원하던 중국인 왕명번(王明藩)을 매수하여 환인현에 머물고 있던 양세봉 장군을 찾아가 중국 항일군과 연합을 논의하자는 구실로 장군을 환인현 소황구(小荒溝)의 골짜기로 유인하였습니다. 예측 하셨겠지만, 1934년 8월 12일(음) 장군은 부관과 함께 길을 나섰고 가던 도중 돌연 좌우 수수밭에서 수십 명의 괴한이 뛰쳐나와 일행을 포위하는 순간 중국인 왕명번은 장군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나는 지난날의 왕씨가 아니다. 이 탄환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일본군에게 항복하라”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장군은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위엄 있게 꾸짖었으나 끝내 밀정 박창해와 중국인 왕씨 등 주구배들의 총격을 받아 현장에서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것만해도 피가 끓는데 더 분한 것은 장군이 순국하고 동지들이 장례를 치뤘는데, 일본 경찰들이 이를 알아채 묘를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 목을 잘라 가져가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륜도 도덕도 없는 야만한 민족인지 너무나 화가납니다. 선생의 목을 잘라 가서 무슨 짓을 했겠습니까? 정말 이 피끓는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할까요.. 항일무장투쟁사에 있어서 일찍이 명성을 떨쳤던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과 함께 실력과 명망을 가진  양세봉 장군의 위국헌신과 멸사봉공 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