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우 지사

2024. 3. 26. 10:42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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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 지사는 일제 말기인 1940년대 초 동창생들과 비밀결사 친우회를 조직했다. 일제의 침탈상과 조국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한 전단을 만들었다. 공장 기숙사와 시장, 부두 등지에 수차례 살포했다. 어느 날 누군가의 밀고에 의해 동지들이 친일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처음 끌려간 곳은 경남경찰부 유치장. 사회주의자와 항일활동의 죄상이 큰 사건만 취급하는 경남고등부였다. 이곳에서의 10개월은 생지옥이었다. 아무리 항일전단을 살포하는 행위를 했지만, 이곳에 끌려올 이유가 없었다. 알고 보니 비슷한 시기에 검거된 울산·부산 ML(마르크스 레닌)연맹 연루 사회주의자 이미동과 여경수 등의 사건과 전단살포사건을 묶기 위한 술책이었다. 모진 고문이 이어졌다.

결국 이미동과 여경수, 손 모 씨 등 3인은 고문을 받던 도중 옥사를 하고 만다.


ML연맹의 하부조직으로 조작하려던 것이 실패하자 친일경찰은 이번에는 같은 직장 경남토건협회 동료였던 김순곤 지사와 연결지으려 했다.

김순곤 지사는 과거 상해 의열단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당시 아버지와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고춧가루를 탄 물로 고문이 이어졌다. 다리에 집중적인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없는 사실을 지어낼 수는 없었다.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동지들은 기소유예가 되고, 전단지가 방에서 발견됐다는 이유로 이광우 지사만 기소가 된다.


죄명은 소위 일제의 치안유지법. 3년형을 받고 김천소년형무소로 이감돼 2년여 옥살이를 하다 광복을 맞아 출소하였다.

이런 사실을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자세하게 아들 상국 씨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다. 부모님의 가슴에 못이 박혔는데 자랑할 일도 아니다."

1989년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추천을 받는다는 공고를 했다. 상국 씨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과거가 이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자.'





■ 고문귀 하판락을 쫓다

일제 감옥에서 2년5개월을 살았는데 판결문이 없었다. 김천소년형무소의 기록은 6·25전란 중 불에 타 없어지고, 부산형무소의 미결 기록도 없었다. 해방 후인 1949년 반민특위가 잠시 활동했지만, 그 기록도 이승만 정권의 친일 청산 거부로 모래밭에 떨어진 물처럼 사라져버렸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정부는 '공적'을 요구하는데 제출할 자료가 없었다. 1989년 낸 독립유공자 신청서는 '거증자료 불충분'의 이유로 유보되었다.


이때부터 상국 씨는 주말을 반납했다. 광복회와 민족문제연구소를 찾아갔다. 김천소년교도소도 몇 번이나 찾아갔다. 뾰족한 답이 없었다. 서울 김천 진주 대전 어디에서도 아버지의 공적을 증명할 문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길 10년, 아파트 한 채를 살 만한 비용이 들었다. 또래 직장동료는 넓은 집도 사고 돈도 모으는데 자신의 삶은 고만고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이름 석 자를 뚜렷하게 기억하는 '하판락'의 소재가 확인되었다. 1997년 부산일보 '어버이날 포상대상자 명단'에 하판락의 이름과 그의 주소가 적힌 기사가 실린 것이다.


하판락. 그는 고문귀·살인귀로 불린 친일 경찰로 일제 경남경찰부 고등과 외사계 외사주임으로 경부보(지금의 경감)를 지냈다.

이광우 지사는 하판락에게 붙잡혀 다리고문과 고춧가루 고문을 직접 받았다. 특히 하판락은 착혈 고문을 잘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고문은 직접 받는 것보다 받기 직전이나, 다른 사람의 고문을 지켜보는 것이 더 고통스럽고 두렵다고 한다. 이광우 지사는 ML연맹 사건으로 잡혀온 이미동 씨 등이 착혈 고문을 받는 것을 보고 진저리를 쳤다. 주사기로 피를 뽑아 몸이나 벽에 뿌리는 만행을 일제경찰은 서슴없이 저질렀다.



신문 포상자 명단에 등장한 '살인귀'
주사기로 피 뽑아 몸에 뿌리던 그였다


"아버지, 하판락을 만나러 갑니다"

"인두겁을 쓴 짐승… 보면 직이뿌라!"


10년 노력 끝 역사의 법정에 세웠다



해방 후 이광우 지사와 고문경찰 하판락의 만남은 1949년 딱 한 번 있었다. 이광우 지사에게 반민특위 증인으로 서 달라는 소환장이 온 것이다. ML동맹 여경수 옥사 사건의 증인이었다. 하판락은 그 자리에서 고문사실을 부인했다. 화가 난 부친은 하판락과 주먹다짐을 했다. 그리고는 결과를 기다리는데 반민특위가 해체돼 버렸다. 당시 사건 담당 김철호 조사관은 전란 와중에 통영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부친의 독립운동 증명은 아이러니하게도 하판락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이런 와중에 하판락의 주소가 확인되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상국 씨는 잠이 오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하판락과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아버지, 하판락을 만나러 갑니다." 상국 씨가 출발하기 전 아버지에게 고했다.
부친은 단호하게 한마디 했다. "응, 만나면 직이뿌라!" "예?" "하판락을 보면 죽이뿌라고, 그는 인간이 아니다. 인두겁을 쓴 짐승이다."

하판락은 자신은 고문하지 않았고 부하인 김소복이 부친을 고문했다고 증언했다. 하판락이 반민특위에 체포된 신문기사와 아버지의 반민특위 증인 출두 서류가 독립유공의 결정적 '거증 자료'가 되었다.


하판락은 친일경찰로 광복을 맞은 뒤 미군정의 비호 아래 경찰로 계속 재직하면서 적산가옥 정리에도 관여했다. 불린 재산으로 시의원 출마와 노인회 회장을 지내며 지역 경로당에 약간의 돈을 내놓았다. 이 때문에 어버이날 부산시장상을 받으면서 존재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후 고문경찰 하판락은 유수의 언론에 회자된다. 상국 씨는 아버지의 부탁을 수행하지는 못했지만, 하판락의 정치사회적 생명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고 여긴다. 가증스러운 과거를 숨기고 명예와 부귀를 누리던 하판락은 과거 고문경찰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남으로써 사실상 사망했다는 판단이다.


하판락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 찍혔다. 하판락의 죄목은 '애국자 살상자'였다. 하판락은 태풍 매미가 덮치던 2003년 9월에 92세로 악명 높았던 일생을 마감했다.

이광우 애국지사는 고문후유증으로 오랜 고생을 하다가 지난 2007년 3월 26일 오전 지병으로 별세했다. 이 지사의 장례식은 항일 애국지사와 유족, 수많은 시민들의 애도 속에 진행되었다. 이 지사는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