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복한 선생(1860.7.24~1924.3.29)

2024. 3. 29. 12:00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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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복한 선생(1860.7.24~1924.3.29)

왕세자를 가르치는 스승이었다가 의병의 길로 가다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을 도모함이 치밀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가볍게 일으켰다고 죄를 준다면 달게 받겠다" -선생의 법정 진술


선생은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매우 불운한 어린시절을 겪게됩니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죽고 한 해를 넘기지 못한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으며 이듬해에는 선생을 돌보던 할아버지마저 타계한 뒤 종조부가 거둬 학문을 가르치며 키웠습니다.

선생은 미관말직에서 시작했으나 실력과 경륜을 인정 받아 왕세자와 왕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는데 서연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대사성, 승지를 역임했으며 왕세자 순종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유명합니다.

1896년 일본의 영향이 점점 심해져 갑오개혁이 이루어지자 단발령에 반대한 선생은 관직을 버리고 충남 홍주로 내려옵니다. 그곳에서 홍주지역 의병을 도우며 활동하였고 이로인해 선생은 일제에 체포되어 문초를 받게됩니다.

1905년 부인을 잃은 슬픔을 잊기도 전에 선생은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에 선생은 어릴적 동지이자 애국운동을 함께한 벗 이설 선생에게 글을 띄워 어찌 한탄만 할 수 있느냐며 유림의 뜻을 모아 연명상소를 올릴 것을 상의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설 선생은 유림의 뜻을 모아 상소를 지을 장소가 마땅치 않다면서 바로 서울로 올라가자며 오히려 재촉하였다 합니다. 정말 "끼리끼리 어울리는 친구" 라는 표현이 떠오릅니다.

선생은 고문후유증으로 병든 몸을 이끌고 이설 선생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정확히 12월 2일 상소를 올렸습니다. 상소에서 선생은 을사5적을 처벌할 것과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세력을 축출하고 왕실을 회복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상소를 올린지 2틀만에 일본 헌병대와 순사가 선생을 잡으러 왔고 체포된 선생은 고문으로 인해 완전히 불구가 되버립니다. 김복한 선생은 을사오적과 같은 하늘을 보고 살 수 없었던 조선의 '진정한' 공무원, 관리 그 자체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1919년 3.1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자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서명하는데 참여하였고, 총 서명자 137명을 규합하여 파리에 보냈습니다. 이 일로인해 서명자 모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고 결국 선생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순국하셨습니다.

"나는 대대로 녹을 받은 신하의 후손으로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평소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갑오년(1894) 6월 이후에는 시골에 칩거하여 평생 자정(自靖)하고자 하였더니, 지난 해(1895) 8월의 대변(大變,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이르러서는 원통하고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조금도 살 마음이 없던 중, 다시 11월 15일의 사변이 일어났다. 이 역시 흉악한 역신(逆臣)들의 소행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의 욕됨이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신민(臣民)된 자의 박절한 정이 격동하여 시세와 역량도 헤아리지 못하고 복수하고 설치(雪恥)할 계획을 세우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을 도모함이 치밀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가볍게 일으켰다고 죄를 준다면 달게 받겠다." - 선생의 법정 진술 중에서(1896. 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