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준식 선생(1900.2.18~1966.4.5)

2024. 4. 5. 11:32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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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준식 선생(1900.2.18~1966.4.5)

무관으로 초지일관한 항일 군인


이준식 선생은 1919년 중국 군사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군, 광복군을 거쳐 해방 후에도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40년을 살았던 일평생을 무관으로 보낸 항일 군인 독립운동가입니다.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군인이 되어 독립전쟁에 뛰어들 생각을 했는데 1919년 3.1만세시위 운동 이후 상해로 이동해 군인이 될 뜻을 품게됩니다. 당시 상해는 국제도시로서 약소민족들의 혁명 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당시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었기에 우선적으로 임시정부로 들어가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입니다.

선생이 가입한 군관학교는 운남강무학교인데 군 간부 양성이 주 목적인 학교였고 1910년대부터 많은 조선의 청년들이 거쳐간 곳입니다. 실제로 김홍일, 김훈, 최용건 선생같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으며 해외 무장투쟁사에 큰 역할을 해내는 인물들을 배출한 학교입니다.

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만주로 이동한뒤 대한통의부에 가입합니다. 대한통의부는 1922년에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독립군 연합단체인데 자유시 참변 이후 침체된 독립군들을 통합한 단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후 3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가 형성되었을때 이준식 선생은 정의부에서 활동을 합니다.  정의부는 서로군정서, 의성단, 독립군당 등 12개 독립군 단체를 통합한 정부행정기관 겸 군사기지였는데 선생은 이곳 정의부에서 군사위원장에 임명됩니다.

그 후 조선혁명당 산하 무력단체인 조석혁명군 참모장으로도 활동하다가 김구 선생이 이끌던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의사가 일본왕을 폭살하려던 항일투쟁에 감동받아 한국군인회를 조직합니다. 이준식 선생은 김구 선생과 연계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폭탄을 던져 항쟁해야만 성과를 크게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며 국내와 국외에서 모인 청년들을 한인애국단에 소개하였습니다. 선생의 계획과 활동이 일본경찰에 알려져 감시를 받던 도중 윤봉길 선생의 홍커우 공원 의거가 성공하였고 이떄 선생은 상해를 탈출하는데 성공합니다.

상해에서 벗어난 선생은 1937년까지 중국군 장교로 항일전쟁을 치뤘고 그 와 중에도 임시정부와의 연계를 위해 크고작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1940년 마침내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고 선생은 총사령부 참모에 임명이 됩니다. 선생은 광복군 제1지대장에 임명되어 수많은 애국지사들과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항전했습니다.
선생은 광복이 될 때까지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복무하며 활동하였고 광복 이후 사단장, 군단장을 역임하고 육군중장으로 예편하였습니다. 그 뒤 재향군인회 회장 및 광복회 회원으로 활동하시다 서거하셨습니다. 선생의 일생은 군인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1919년 사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40년간의 군생활은 우리 국군의 초석을 닦아 주셨습니다.



참고자료
http://tvcast.naver.com/v/507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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