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정훈모 (鄭燻謨)1888-03-20 ~ 1939-04-07

2024. 4. 7. 14:49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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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정훈모 (鄭燻謨)1888-03-20 ~ 1939-04-07

본적: 경상북도 예천 풍양 우망 334

만주방면에서 활동한,

서로군정서 소속 독립투사


정훈모 선생의 호는 추산, 자는 국렬이며,

1888년 3월 20일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에서 아버지 정인호 씨와 어머니 광주 노씨 사이에서 태어나셨다. 가족으로 형님이 한 분 계셨으며, 선생께서 태어난 우망리는 동래 정씨가 대대로 살아오던 집성촌으로 마을 전체가 친척 간이었다.



선생께서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다.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졌고,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맺어졌다.

같은 해 창남학교에 입학하여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등 학문을 배운 것으로 전해진다.



1918년 무렵. 선생은 고향인 우망리를 방문했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져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다시 만주로 향했는데 이때 부인 남영선 여사가 진원을 임신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만주로 향한 선생은 남만주 동사촌에서 애국지사 유시언 선생과 대한독립단 창단에 참여한다.

곧이어 성동학교를 설립했고 청년 광복군 배출에 힘쓰셨다.

이뿐만이 아니다. 군사교육뿐 아니라 거주지역 한인들의 생계를 위해 농업 교육을 장려하고, 선생도 함께 참여하여 식량 확보를 위해 농사일을 거들었다.



1919년 이후 서로군정서 최고사령관 이상룡 선생 참모(비서)로 활동하며 임시정부와의 연락책을 담당해 상해를 2번 다녀왔다. 서로군정서 소속으로 1920년 2월 이후, 남만주와 북만주 일대에서 한반도 국경 부근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무대로 참전했다. 특히 일본 기관 시설 및 관공서 파괴의 공적이 드러났다.



1925년 6월 미쓰야협약으로 일본 경찰 뿐 아니라 중국인들까지 독립운동가 색출에 혈안이 되었는데, 이때 일본 경찰과 마찰이 있었고 선생은 북만주로 이동했다.



1926년 선생의 아버지 정인호 옹이 사망했으나 일제의 감시로 인해 선친의 장례에 참석할 수 없었다.



1932년 만주가 일본의 무력으로 강제점령되었고,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직후 독립운동가와 단체의 감시 탄압은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선생은 중국관과 연합하여 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



1939년 초 동지들과 러시아 아르하라(ARKHARA)에서 만주 싼장성(현재 헤이룽장성) 자무쓰시로 이동 중 일본군과의 교전으로 온몸에 총상을 입은 채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극심한 고문과 총상으로 생명이 위독해지자 자무쓰 감옥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여타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하듯 보석으로 나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국하였다.



1939년 4월 7일 향년 52세로 25년간 독립투쟁에 뛰어든 어느 인생이었다.



선생의 장례는 자무쓰시 지역동포들이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정훈모 선생이 만주로 떠난 후 태어난 아들 (정진원, 1919년 생)은 아버지의 순국 소식을 받고 만주를 방문해 무덤으로 아버지를 처음 만났다.



해방 후 아들 정진원은 정훈모 선생의 서훈을 위해 평생을 한 맺힌 이야기를 전하려 애썼지만, 생전(1976년 사망)에는 서훈 소식을 받지 못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한 후,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승격하여 추서했다.



정훈모 선생의 유해는 자무쓰시 공동묘지에 묻힌 후, 중국과 당시 국교가 없어 확인할 수 없었으며, 1990년대 중국과 국교가 수립되며 만주 지역 방문은 가능하지만, 자무쓰시 공동묘지는 개장되어 현재 아파트로 변해버렸다. 후손들은 선생의 유해를 찾을 수 없어 2019년 4월 9일 불과 7개월 전 선생의 위패와 우망리에 모셔져 있던 아내 남영선 여사의 유해를 함께 국립 서울현충원에 봉안(배위)하였다. 이로써 선생과 부인은 헤어진 지 100년 만에 함께 영면하게 되었다.



2019년 10월 12일 선생의 고향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 산2-5번지 예천 쌍절암 생태숲길 입구에 선생의 기념비 건립이 완성되었다.



정훈모 선생의 친손자 정지영 씨와의 인연으로 이 잊혀진 이야기를 세상에 전한다.







<발견사료 & 참고문헌>

1. 1919.滿洲 망명 후 西路軍政署에 가입 督辦 李相龍의 참모로 활동.

2. 1938년 未詳日에 露領에서 자므스크(佳木斯)로 들어오다가 日滿混成軍과 교전 끝에 부상으로 피체되어 고문을 받고 病保釋 중 사망.

[3.1운동비사(이병헌) 930면 참조]

[한국독립사(金承學) 725면 참조]

[순국선열명부(경북도) 19면 참조]

[사망전보(1938.4.7)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