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19. 10:04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권기옥 선생(1901.1.11~1988.4.19)
한국 최초의 여자 파일럿
"비행사가 되어 일본으로 폭탄을 싣고 가리라"
하늘을 올려다보면 한 쌍의 전투기가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전투기를 모는 조종사와 항공기의 낭만에 한번쯤 파일럿을 꿈꾸거나 영화 탑건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을겁니다.
하지만 조종사가 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더욱이 일제강점기에 비행사의 꿈을 꾼다는건 말그대로 불가능이였죠.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탄생한 여성 비행사가 있으니 그녀가 바로 권기옥 선생입니다. 선생은 오직 조국 해방을 꿈꾸며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조국 독립을 위해 비행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가난한 집안 환경에 4살 위인 언니는 출가하고 어머니는 병약했던 가정환경. 권기옥 선생은 집안 살림을 도맡으며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숭의여학교에 다니며 선생님들을 통해 독립운동에 눈을 뜬 선생은 졸업반 때 비밀결사 '송죽회'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학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거리에서 만세운동을 벌였습니다. 이 일로 선생은 유치장에 3주간 감금당하다가 풀려납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단신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주로 숭의여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독립군자금을 모았는데, 학생들은 긴 머리를 잘라 판돈을 가져오거나 어머니의 패물을 팔아 돈을 마련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미행하던 일경에 체포돼 6개월간 혹독한 고문을 받게됩니다. 끊임없는 고문 속에서도 선생은 임정 활동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했으며 유치장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수십 번 기절하기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실제 권기옥을 취조한 일본인 형사 다나카는 심문조서에 '이 여자는 지독해 도무지 입을 열지 않으니 검찰에서 단단히 다루길 바란다'고 적었습니다.
출옥한 후 1920년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애국 동지들과 접선하기 위한 방편으로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단을 조직, 여자전도대장으로서 전국을 순회•강연하며 비밀 공작을 전개하였으며 일제의 통치기관 폭파에 함께해달라는 제의를 받고 숭현소학교 석탄창고에 독립단원들을 숨겨주는 일을 했습니다. 권기옥 선생 덕에 독립단원들은 폭탄을 제조하고 몸을 숨길 수 있었습니다. 1920년 8월 평안남도 경찰부 청사가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 사건으로 임정에 협력한 모든 인물들에게 체포령이 떨어졌는데 이 중 권기옥 선생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국내에서의 활동이 더 이상 어려워지자 선생은 상해로 망명하여 안창호 선생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해로 탈출한 선생은 독립운동을 돕고, 시간강사로 일하며 학생들을 양성했습니다. 또한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실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영어와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선생이 외국어를 배운 또 다른 이유는 1917년 미국인 스미스의 비행을 처음 보고 마음 깊이 비행사의 꿈을 품으며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비행을 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임시정부는 육군 항공대 창설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중국 항공학교에 한국 청년들을 추천해 비행사 양성을 추진하였고 이런 방침의 일환으로 권기옥 선생 역시 임정의 추천서를 받았지만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여러 항공학교에서 입학 거절을 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원했던 운남육군항공학교 제 1기생으로 입학하고 1925년에 비행사 자격을 취득, 중국군 혁명 공군에서 한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 복무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에 임시정부로 돌아간 선생의 꿈과는 달리 비행기를 구입할 여력이 전혀 없는 극빈 한 현실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중국군대에 들어가 항일전쟁을 펼치기로 마음먹습니다. 자신의 비행술을 독립운동에 쓰고 싶던 선생은 북경에 있는 중국 항공대에 들어가 장제스의 국민정부 아래서 항공사로 일하며 1932년 상해전쟁이 일어나자 비행대에서 정찰임무를 맡아 폭격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비행가로서 활동 외에도 권기옥 선생은 '한국애국부인회' 재건에도 참여했습니다. '한국애국부인회'는 조선의 여성들이 당파,사상 등을 초월하여 총 단결하여 조국의 독립을 이끌어내자는 단체였습니다.
1943년 여름 권기옥 선생은 중국공군에서 활동하던 최용덕, 손기종 비행사등과 함께 한국비행대 편성과 작전계획을 구상합니다. '한국광복군 비행대의 편성과 작전이 그 결실이었는데 미국과 중국에서 비행기를 지원 받아서 한국인 비행사들이 직접 전투에 참여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습니다. 권기옥 선생은 이제야말로 비행기를 타고 조선총독부를 폭격하리라던 오랜 꿈이 눈앞에 다가왔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해방은 독립운동가들의 꿈을 앞질러서 너무 빨리 와버렸습니다.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서울진공작전을 펼치려던 그 직전 열강의 힘으로 독립이 이루져버린것입니다. 아마 권기옥 선생역시 김구 선생이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슬퍼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다면 분명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고 그 대가는 결국 신탁통치로 이어졌으며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찬탁과 반대하는 반탁세력의 싸우던 시기 남북 단독 선거가 이루어지고 결국 남북전쟁까지 발발합니다.
해방을 맞은 이후에는 6.25 전쟁시기 국회 국방위원회 유일의 여성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전 재산을 장학 사업을 위해 기부하고 장충동2가의 낡은 목조 건물에서 여생을 보내시다 타계하셨습니다.
참고자료
https://youtu.be/J6AxIL0Gq5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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