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양기탁 선생(1871.4.2~1938.4.19)

2024. 4. 19. 10:15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728x90

독립운동가 양기탁 선생(1871.4.2~1938.4.19)

투옥 탈출 투옥 탈출... 끝 없이 항일투쟁 나선 언론인

양기탁 선생은 한국인의 민족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외세의 침략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대한매일신보 신문사 창간이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베델을 사장으로 독립운동사에 아주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하기때문에 잘 알아두셔야 합니다.

당시 영국인 명의로 이루어진 신문사여서 당연히 일본의 감시망에서 자유로웠다는 장점이있었고 독립운동 특히 의병활동을 상세히 게재하여 이를 높이 평가하며 항일의식 고취에 앞장서서 당시 우리 민족의 신문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때는 일본이 신문지법이라는걸 통해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체의 기사를 검열하였기 때문에 대한매일신보는 단비같은 존재였음을 짐작해볼수 있겠습니다.

당시 이슈가 된 내용으로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소식을 경사났다고 알린 사건이 있습니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신문사 안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개설하여 보상금을 모금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당시 총무직을 맡고 있던 선생에게 말도 안되는 억지 혐의 (국채보상금횡령)를 씌어 구속하였고 사장인 영국인 베델이 억지 혐의를 증명하여 결국 무죄로 풀려났지만 2달간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강한 정신력과 독립에대한 의지는 고문으로 꺽이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직후 선생은 안창호 선생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였습니다.
선생은 당시 국내에서 독립운동 및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고 국민들로부터 존경또한 받고 있었습니다. 신민회의 총감독은 선생이 맡고, 집행은 안창호 선생이 담당하게됩니다.

신민회 본부는 대한매일신문사 안에 두고 지방지국을 연락망으로 구성하였으며 조직을 도, 군, 반단위까지 점조직으로 세포조직화하여 누가 회원인지 모르게 하였으며 창건위원들은 신민회 창립 후 즉각 자기의 영향력 범위 안에 있는 인사들을 가입시켜, 1910년경에는 약 800명의 회원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영향력 있는 애국계몽운동가들을 거의 전부 망라한 것이었기 때문에 신민회의 규모와 창건멤버들의 역량과 평가가 어떠하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1900년대 후반에는 일본의 의병탄압이 절정을 이루어 의병활동이 매우 위축되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신민회는 국외 독립군기지와 독립군대를 본격적으로 만들기위해 선생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여기서 나온 결정이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여 무관학교 들을 설립하고 기회를 보아 국내 진입작전으로 국권을 회복하자는 결론이 나옵니다. 바로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학교가 우리가 잘 알고있는 신흥무관학교입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친숙한 의열단! 그리고 영화 암살에서 나온 '속사포'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입니다.

뒤이어 일본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시도사건 (일명 105인사건)을 거짓으로 꾸며내어 전국에있는 영향력있는 신민회 회원(독립운동가 지도층들) 800명을 체포하는 일을 벌입니다. 이 중 105인이 투옥이되어 우리는 105인 사건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서 선생은 징역 10년을 선고받게됩니다. 모진 고문을 받다가 선생은 유배지로 이동하게되는데 그곳에서 성공적으로 탈출 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에서 남은 여생을 바칩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다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2년간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3.1운동을 맞이하게 됩니다.

1920년 유배가 풀려서 서울로 상경했을때 당시 우리나라에선 동아일보 신문사가 창간되었고 선생을 고문으로 임명하게됩니다. 같은 해 미국의원들이 동양 3국 순방의 일환으로 우리나라를 순방했을때 서울역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 다시 한번 일본 경찰에 붙잡혀 투옥되었으며 이 소식에 선생의 어머니가 숨을 거두시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잠시 방면된 틈을 타 선생은 다시한번 탈출에 성공하였고 만주로 이동하게됩니다. 선생의 일생은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반복됩니다. 서거하시기 전까지 선생의 머릿속에는 오직 조국만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탈출 투옥 탈출 투옥 그리고 다시 탈출 투옥.. 선생이 그토록 조국을 위해 뛰어들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남겨주고 싶었던 것이었을까요. 어쩌면 우리가 당연히 여기고 살고있는 오늘날의 '권리' 와 '의무' 가 아니었을까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