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혁 선생(1875.10.6~1939.4.23)

2024. 4. 23. 11:17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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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혁 선생(1875.10.6~1939.4.23)

만주 독립군의 모태 성동사관학교 세운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육군 무관학교 출신 대한제국 육군 정위로 북로군정서에서 청산리대첩을 치르고, 대한통의부 군사부감이 되어 항일 무장투쟁을 하셨다. 대한독립군정서 대표로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어 성동사관학교 설립, 치열한 독립투쟁을 벌이다 순직하셨다.

성동사관학교에서는 초기 150명의 청년을 선발하여 독립군 사관 양성에 힘썼다. 교장에 선생을 비롯하여, 부교장에 김좌진, 교관에는 박두희, 백종렬, 오성세 외에 5명이 있었고, 고문으로는 이범윤, 조성환이 임명되었다. 매년 2회에 걸쳐 속성으로 사관을 양성하여 총 500여 명을 졸업시켰는데, 이들은 신민부 독립군의 중견간부로서 항일 무장투쟁의 기둥이 되었다.

성동사관학교 교장으로 독립군 중견 500여명을 육성. 백두산 일대로 신민부 세력을 확대했다.

훗날, 일제에 피체된 뒤 선생을 비롯한 신민부원 10명은 신의주로 호송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1929년 6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선생은 징역 10년형을 받은 뒤, 같은 해 7월 평양복심법원에서 공소를 취하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이로부터 선생은 신의주형무소, 평양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서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그럼에도 선생은 의연히 일제의 회유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9년여의 옥고는 선생의 몸에 병마가 침투하게 하였고, 그로 인해 1936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향리에서 요양하였으나 오랜 옥고로 얻은 중병을 이기지 못하고, 1939년 4월 23일 6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