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4. 20:38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최양옥(崔養玉) 선생
(1893. 12. 5~1983. 5. 4) –
강원도 횡성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독립투사
<조선총독부 송금차량 탈취 실행방법(1929.4.18) 〉
․우편자동차가 오면 이선구는 자동차를 향해 우측에 정지하여 손을 들어 이를 세울 것.
․최양옥은 자동차를 향해 좌측에 있고 그 때의 상황에 따라 권총으로 협박, 정차시키고 즉시 운전사를 소지한 삼놋줄로 포박한다.
․김정련은 자동차를 향해 좌측에 있고 양옥 등보다 金谷으로 향해 2․3정 떨어진 장소에 위치하여 京城방면에서 오는 자동차, 기타 통행인의 경계를 하고 만일 우편자동차가 정차하지 않을 때는 권총으로 협박하여 정지시킬 것. 그리하여 우편물간 안으로 들어가 빨간 행낭을 찢고 현금을 탈취할 것.
― 선생의 「심문조서」중에서―
선생은 1893년 음력 12월 5일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화전리에서 강릉 최씨 재건(在建) 과 진주 강(姜)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선생은 독립운동 당시 권인옥(權仁玉)이란 별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 1907년 일제가 광무황제를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는 상황을 목격하고, 14세의 어린 나이지만 분통을 느끼고 민족적 각성을 하여 ‘왜에게 복수하겠다’고 다짐하였다. 1913년 원주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하였고 그 해 중동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이후 8남매의 장남이었던 그는 강원도와 서울지역에서 측량업에 종사하거나, 잡화를 팔며 가정을 책임져야 하였다. 어려운 생활을 하던 그는 자신이 곤궁하게 된 원인을 일제의 식민통치와 관련지어 생각하고 더욱더 일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1919년 3월 경 선생은 서울의 아버지 친구 신병선(申炳善)의 집에서 머무르던 중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온 신병선의 아들 신덕영(申德永)을 만나 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받고 이에 찬성하였다. 선생은 3․1운동의 발발 직후 고향인 횡성에 내려가 음력 3월 11일, 양력 4월 1일날 횡성읍 장날에 벌어진 횡성 4.1만세운동에 앞장선 대표적 인물이었다.
대동단(大同團) 조선지부원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
이전에 정정화 선생을 말하며 대동단을 만든 김가진 선생을 언급했다. 김가진 선생을 총재로 두고 있는 대동단의 조선지부 책임자 신덕영 선생이 강원도 원주군 소초면 둔둔리에 찾아왔다.
이때가 1919년 음력 11월이다. 신덕영 선생은 최양옥 선생에게 대동단에 입단하여 구국운동에 힘써달라고 말했다.
1920년 여름, 선생은 농림주식회사 주식모집원으로 신분을 위장하여 신덕영, 박일봉(朴日鳳), 노형규(盧衡奎), 노석중(盧錫中) 선생등과 함께 전라남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대동단을 돕기로 맹세한다.
1920년 10월 15일 광주군 본촌면 일곡리의 이윤호(李允鎬)의 집에서 신덕영, 박일봉, 노기준(盧基準) 등과 협의할 때 권총을 구해오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러나 권총은 쉽게 구입할 수 없었다. 총을 구입하지 못하여 거사의 추진을 망설이던 선생과 신덕영 등 대동단 조선지부원들은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위해 단원을 나눈다. 그러나 이들의 독립자금 모금활동은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었고 결국 11월 5일 전남 광주로 내려가던 도중 체포되었다. 선생과 대동단 동료들은 광주시와 담양군․곡성군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 일경에 체포되었고 1921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7년의 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된다.
선생은 수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26년 11월 15일 대구형무소에서 나왔고 출감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한 뒤 1927년 산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에서 안창남(安昌男)·이용화(李容華)·김정련(金正連) 등과 북만주에 독립군 비행학교 설립계획을 세운다.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선 큰 재정이 필요했고 개인의 차원이 아닌 보다 조직적인 단체의 이름으로 학교를 설립할 필요성을 느낀다.
선생은 동료들과 함께 ‘함께 소리내어 알린다’는 ‘공명(共鳴)’의 의미를 담은 대한독립공명단을 만든다. 단장 안혁명(安革命), 부단장 신덕영, 재정부장은 이영(李英)이었다. 선생은 재정부 부원이었다
1928년 말 경, 다음 해 5월 서울에서 산업박람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고 서울에 들어가 일본의 고관과 관헌을 살해한 뒤 송금차량를 탈취하여 다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로 거사를 계획한다. 선생은 공명단 동료 김정련, 이선구 선생과 함께 서울로 잠입한다.
1929년 4월 8일 오후 2시 권총 2정과 실탄 22발을 양복 안의 복부에 은닉하고, 김정련은 한복을 입고 실탄 12발을 장전한 총 1정을 왼쪽무릎 밑 안쪽에 붕대로 감아 숨기고 신의주로 들어왔다. 신의주에 들어온 이들은 이선구의 집으로 찾아가 출발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1929년 4월 9일 오전 1시 신의주를 출발하여 9일 오전 7시 5분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선생은 10일 오전 7시경에 서울에 도착한 김정련, 11일 오전 10시경에 서울에 도착한 이선구와 사직공원 등에서 거사를 협의하였으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거사가 지체되었다. 그러다가 4월 16일 선생과 김정련이 이선구를 설득하여 거사를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1929년 4월 17일 오전 11시 선생 일행은 서울역 황금정(黃金町) 2정목(丁目)에 위치한 이명구(李命九)의 집을 출발하여 방산정(芳山町) 63번지 잡화상에서 삼놋줄 등 필요물품을 구입한 후 차를 타고 양주군(楊州郡) 구리면(九里面) 교문리(橋門里)에서 내려 양주군 미금면(渼金面) 평내리(坪內里)의 안칠성(安七星)이 경영하는 여인숙에 도착하여 1박하였다. 이곳에서 선생은 이선구에게 모젤식 권총 1정과 실탄 8발을 넘겨주고 사격술을 교수하였다.
1929년 4월 18일 오전 7시경 아침을 먹고 선생 일행은 양주군 미금면과 화도면(和道面)의 경계인 마석(麻石, 마치)고개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춘천방면으로부터 서울로 향하던 우편송금차량을 탈취하는 의거를 단행하였다.
자신들의 몸을 감시하기에 용이한 정상 바로 아래에 위치한 후 우편차량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우편차를 습격하여 돈을 빼앗는데 성공한 공명단원들은 서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경찰은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의 경찰병력과 일본군의 응원병력을 얻어 공명단원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양주(楊州)의 천마산(天摩山)에 은신하고 있었던 공명단원들은 불안한 환경 속에서 며칠 밤을 지새우면서도 독립의 의지를 더욱 불태웠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최양옥 선생은 일본경찰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나머지 공명단원들은 1주일 동안 치열한 항전을 벌이다가 탄환이 다 떨어져 끝내 잡히고 말았다 최양옥, 김정련, 이선구 선생은 모두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선구 의사는 고문으로 옥사, 순국하였다.
최양옥 선생은 1929년 4월 21일 오전 5시 30분 최상하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선생은 체포될 때, 일본경관이 들이닥쳐 자신을 붙잡고 총을 찾으려고 허둥대자 “총은 이불 속에 들어있다”고 하며 총 있는 곳을 가리킬 정도로 태연하고도 위엄이 있었다.
체포된 선생 일행은 경기도 경찰부로 넘겨져 조사받은 뒤 1929년 5월 10일 경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넘겨졌다. 그리고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10여일간 조사받고 5월 20일 경 기소되었다.
이들은 범죄사실을 인정하였으므로 예심에 부칠 필요 없이 즉시 재판에 회부되었다.
9월 6일 열린 재판정에서 선생 등 세 명의 동지는 굳은 악수로써 인사를 나누는 당당함을 보임으로써 민족의 기개를 드러내어 보였다. 선생은 1929년 12월 13일 치안유지법 위반,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우편법 위반, 강도의 죄목으로 징역 10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다 17년간의 옥고를 치른 선생은 만기출옥 후 서울에 사는 사촌의 집에서 요양을 하며 지냈다.
여기서 한가지 숨겨진 이야기를 알게되었는데 공명단원 김정련 선생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을때 옆 방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수감되어 있었다.
당시 수감자들끼리는 감방 벽이나 나무바닥을 딱딱 두드려 미리 정해 놓은 암호로 의사소통하는 방법이 있었다. 서로의 상황을 알리고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옆방에서 옆방으로 전달하는 이 방법의 이름은 ‘타벽통보법’ 이다.
김정련 선생은 타벽통보법이라는 수용소 내에서 감방 벽을 두드려 수감자들끼리 의사소통을 했던 방법을 안창호 선생에게 알려주었고, 그러던 중 외곽 순찰을 돌던 간수에게 들키자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똥통을 뒤집어엎고 소란을 피워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안창호 선생은 주로 미주에서 활동했기에 이 암호를 몰랐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11~12옥사에 가보면 당시 김정련 선생과 도산 안창호 선생의 모습을 재연해놓은 밀랍인형을 볼 수 있는데, 문득 몇 년전 처음 서대문형무소에 들려서 전시되어있는 밀랍인형을 보며 무심코 지나갔던 때가 생각이 났다.
대동단과 공명단을 깊이 있게 조사해보면 일제 강점기 무장투쟁으로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애국지사들 영화 같은 이야기가 많이 담겨있다. 이곳에서는 최양옥 선생을 다루었지만 오프라인 강좌나 독립운동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나머지 영웅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재조명하여 알릴 것을 독자분들께 약속드린다. 이들은 자신의 전 인생을 조국에 바친 진정한 의열 독립투사들이었다
'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립운동가 안규홍 선생(1879.4.10~1911.5.5) (0) | 2024.05.05 |
---|---|
독립운동가 신익희 선생(1894.6.9~1956.5.5) (0) | 2024.05.05 |
독립운동가 류인식 선생(1865.5.3~1928.4.29) (0) | 2024.04.29 |
독립운동가 김상덕 선생(1892.12.10~1956.4.28) (0) | 2024.04.28 |
독립운동가 이석용 선생(1878~1914.4.28) (0) | 2024.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