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20. 00:50ㆍ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 송학선 선생(1897.2.19~1927.5.19)
'일제의 총독을 처단하리라'
젊음과 맞바꾼 어느 날의 각오
1926년 아직 겨울의 찬바람이 부는 3월이었다. '수리 중' 이라 써있는 경성사진관. 이곳 부엌에 양식 칼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을 선생은 발견하고 다음과같이 말했다.
"내가 사이토 일본총독을 죽이고자 한 것이 몇 년 전부터의 소망이었는데, 좋은 칼이 없는 것이 한이었는데! 오늘 이 칼을 얻은 것은 하늘이 주신 것이다.."
손잡이가 희고 길이는 15센치정도되는 고급 과도였다.
송학선 선생은 이 과도를 숫돌에 갈아 미닫이 창틀 위에 두었다. 고종황제의 아들 융희황제가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함을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 바로 창덕궁으로 달려가 망곡대열에 참여하였다. 그곳에 모인 사람 모두가 마치 자신의 부모가 죽은 것처럼 슬퍼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융희황제의 빈소는 창덕궁안에 마련되었는데 빈소의 출입문이 바로 '금호문' 이다. 금호문은 창덕궁의 서남쪽 문을 지칭하는데, 송학선 선생은 이 문을 통해 총독부의 고관들이 출입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이 문을 통해 일본 총독도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가슴 속에 품었던 총독 처단의 꿈이 드디어 눈앞에 다가왔다고 느낀것이다.
금호문 앞에서 잠복해있던 선생은 오후 1시경 일본인 3명이 탄 자동차가 창덕궁으로 들어가자 총독차량이라 판단 후 자동차가 다시 금호문을 나올때 이것을 놓치지않고 번개같이 뛰어 올라 그 자리에서 2명을 척살했다. 송 선생을 뒤 쫓는 기마순사와 서대문경찰서 순사 오필환또한 선생에게 다가오다 척살당했다. 피체된 뒤 일경은 비겁하게 무방비의 선생을 칼로 찔렀다.
나중에 알게되었지만, 자동차 안에 타고있던 일본인 2명은 총독 일행이 아니였음을 알고 선생은 통분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물론 그 2명도 우리 조선인들에게 악행을 자행한 악인들이어서 별로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된 선생에게 재판관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재판관: 피고는 어떤 주의자인가?
사상가인가?
송학선: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여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못 죽인 것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 되겠다
1927년 5월 19일 선생은 결국 사형장의 이슬로 순국하셨다.
'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립운동가 임병찬 선생(1851.2.5~1916.5.23) (0) | 2024.05.23 |
---|---|
독립운동가 유근 선생(1861.9.26~1921.5.20) (0) | 2024.05.20 |
독립운동가 허은 선생 (0) | 2024.05.20 |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1861.4.8~1922.5.19) (0) | 2024.05.20 |
독립운동가 오면직 선생(1894.6.15~1938.5.16) (1) | 2024.05.16 |